바이든, 가니에 “아프간군은 최고의 군대”… 끝까지 상황 오판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9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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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터, 카불 함락 23일전 통화 공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무장세력 탈레반의 손에 넘어가고 만 아프가니스탄 상황을 막판까지 오판하고 있었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통화 녹취록이 공개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점령하기 약 3주 전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과의 통화에서 아프간군을 최고의 군대라고 했다. 또 가니 대통령에게는 “당신은 훌륭하고 고결한 사람”이라고 치켜세웠다.

로이터통신은 두 사람이 7월 23일에 14분간 나눈 통화 녹취록과 음성 파일을 익명의 관계자로부터 입수해 지난달 31일 보도했다. 통화한 날은 탈레반이 수도 카불을 장악하고 가니 대통령이 대통령궁에서 빠져나와 외국으로 달아나기 23일 전이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 통화에서 가니 대통령에게 “당신은 분명히 최고의 군대를 갖고 있다”면서 “7만∼8만 명인 (탈레반) 군대와 비교해 당신은 30만 명의 잘 무장된 군대가 있다. 그들은 분명히 잘 싸울 능력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이 같은 바이든 대통령의 칭찬이 무색하게 아프간 정부군은 탈레반의 공격에 제대로 저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수도 카불을 넘겨줬다. 30만 명에 이른다는 군대 규모가 대부분 장부상으로만 존재하는 유령 병력이었다는 사실도 뒤늦게 드러났다.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 내 사태 변화를 전혀 예측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 발언도 했다. 그는 “우리는 외교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당신의 정부가 단지 생존하는 것뿐 아니라 지속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열심히 싸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두 정상이 통화할 당시 아프간은 이미 거점 지역의 절반이 탈레반의 손에 떨어진 상태였다. 로이터는 “(이런 발언은) 통화 23일 뒤 아프간 정부가 붕괴할 것이라고는 바이든 대통령이 예상하지 못했음을 시사한다”고 전했다.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인식한 쪽은 오히려 가니 대통령이었다. 그는 바이든 대통령에게 “우리는 본격적인 침공을 당하고 있다”며 “파키스탄이 계획하고 물자를 지원한다. 국제 테러리스트 1만∼1만5000명이 침공에 가담하고 있으며 대부분 파키스탄인”이라고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통화 내내 아프간 내 실제 전쟁 상황보다 이에 대한 국제사회의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식의 발언을 이어갔다. 그는 “‘탈레반과의 전투가 잘 안되고 있다’는 인식이 전 세계와 아프간 일부에 존재한다는 건 굳이 내가 당신에게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며 “그런 인식이 사실이든 아니든 다른 그림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그러면서 그는 가니 대통령에게 저명한 정치인들과 함께 기자회견을 열어 새로운 군사전략을 소개하면 이런 인식을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통화에서 가니 대통령을 향해 “이런 말을 당신한테 직접 하는 게 주제넘은 것은 안다”면서 “나는 당신을 오랫동안 알아왔는데 당신은 훌륭하고 고결한 사람”이라고도 했다. 가니 대통령은 카불이 탈레반에 함락되기 직전 거액의 돈을 챙겨 외국으로 달아났다. 로이터는 녹취록 내용에 대해 백악관에 입장 설명을 요청했으나 백악관은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뉴욕=유재동 특파원 jarret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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