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영혼을 잃었다” 콜로라도 총격 피해자들 사연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24일 10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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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피해 ‘아메리카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온 난민 가족의 아들, 손주 볼 예정이었던 할아버지, 30년 간 마트서 일한 매력적인 미소의 직원, 그리고 총기 소지를 열렬히 지지했던 20살 청년….

22일 미국 콜로라도주 볼더의 식료품점에서 총기 난사 사건으로 숨진 희생자들의 절절한 사연이 언론을 통해 전해졌다. 이들은 평범한 가정의 아버지이자 어머니, 자식이자 할아버지였다. 희생자들 사이에는 인종이나 출신, 배경, 나이, 성별에 공통점이 없는 것으로 드러나 이번 범죄가 ‘무차별 난사’라는 분석에 힘이 실릴 전망이다.

23일(현지 시간) 뉴욕타임스는 이번 사건으로 숨진 희생자들의 사진과 사연을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숨진 이들은 경찰관 에릭 탤리(51), 데니 스통(20), 네븐 스태니식(23), 리키 올즈(25), 트라로나 바크코위악(49), 수전 포츈(59), 테리 레이커(51), 케빈 마호니(61), 린 머레이(62), 그리고 조디 워터스(65) 등 10명이다.

올해 23세인 네븐 스태니식은 참사가 일어난 슈퍼마켓 ‘킹 수퍼스’ 매장 안에 있는 스타벅스 커피머신을 고친 후 주차장을 나서려던 참에 총을 맞고 숨졌다. 그는 세르비아 난민의 아들이다. 그의 가족들은 1990년대 보스니아 내전 당시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고 스태니식을 낳았다. 그는 고교를 졸업한 뒤 곧바로 아버지와 함께 커피머신 수리 일을 시작했다. 스태니식의 가족과 가까운 페트로빅 신부는 “난민들은 희망을 품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이곳으로 왔다”며 “그들의 가족은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도망쳤지만, 여기서 끔찍한 비극을 당했다. 납득할 수 없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네븐 스태니식. 페이스북
네븐 스태니식. 페이스북

25세 리키 올즈는 킹 수퍼스의 프론트 매니저였다. 그는 최근 7, 8년간 이 곳에서 일을 했다. 주변 사람들에 따르면 올즈는 생전 에너지가 넘쳤고 명량했으며 낙천적인 사람이었다. 3남매 중 첫째 딸이었던 그는 7살 때 엄마로부터 버려졌다. 올즈의 엄마는 어느 날 갑자기 라파예트에 있는 올즈의 할머니집 문 앞에 올즈를 놔두고 떠났다. 엄마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랐지만 그는 활달했고 하이킹과 캠핑을 즐겼다. 가족들과 야구하는 것을 몹시 좋아했다고 NYT는 전했다.

희생자 리키 올즈. 인스타그램
희생자 리키 올즈. 인스타그램

테리 레이커는 참극이 일어난 킹 수퍼스에서 30년 간 근무한 ‘베테랑 점원’이었다. 그와 가깝게 지낸 알렉시스 크누선 씨(22)는 콜로라도 보더대의 한 프로그램을 통해 서로 알게 됐다고 인연을 말했다. 크누선 씨는 숨진 레이커 씨가 스포츠 경기에서 좋아하는 팀을 응원하는 것을 매우 즐겼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났지만 끈끈한 사이였다. 크누선 씨는 “나는 잠이 워낙 많아서 아침 9시 전에는 전화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레이커는 짓궂게 6시에 전화해 깨우곤 했다”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 “참혹한 일이다. 어디선가 여전히 그가 일을 하고 있을 것만 같다”고 말했다. 한 단골 손님은 “레이커 씨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화가 가라앉았다”며 “그의 미소에는 그런 매력이 있었다”고 말한 뒤 울었다.

희생자 테리 레이커. 페이스북
희생자 테리 레이커. 페이스북

케빈 마호니 씨는 호텔 개발 및 접객 매니지먼트 회사인 스톤브릿지의 임원으로 근무하다 2014년 퇴직했다. 그의 딸에 따르면 마호니는 곧 손주를 볼 예정이었다. 현재 임신 중인 그의 딸 에리카 마호니는 “아버지를 영원히 사랑한다”고 했다.

최근 몇 년 간 킹 수퍼스에서 일해 온 데니 스통 씨는 총기소지의 열렬한 지지자로 알려졌다. 그는 미국에서 총기 소지 권리를 보장한 수정헌법 2조의 지지자였다. 최근 자신의 생일에도 그는 페이스북에서 친구들을 향해 총기소지 권리 옹호재단에 기부하라는 메시지를 올렸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총기 범죄로 목숨을 잃었다. 그의 고교 친구는 “내가 만나본 사람 중 가장 친절했던 아이”라고 말했다. 스통 씨는 파일럿이 되고 싶어했으며 파일럿 자격증을 따기 위해 파트 타임으로 킹 수퍼스에서 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희생자 데니 스통. 페이스북
희생자 데니 스통. 페이스북

뉴욕 잡지사에서 사진 디렉터로 일했던 린 머레이 씨는 23살 올리비아, 22살 피어스의 엄마다. 은퇴한 뒤에도 남을 돕는 것을 즐겼던 그는 사건 당일에도 인스타카트(미국의 장바구니 주문 어플) 주문을 채우기 위해 킹 수퍼스에 들러 장을 보다가 변을 당했다. 그의 남편 존 멕킨지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친절한 여성”이라고 했다. 이들 부부는 뉴욕에서 살다 2002년 스튜어드로 이사했고,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다시 콜로라도로 옮겼다. 그는 생전 아이들을 위해 할로윈 의상을 디자인하는 것을 즐겼으며 예술적 감각이 풍부했다.

트라로나 바크코위악은 볼더에서 요가복 상점을 운영했다. 그의 남동생은 누나를 “한 줄기 빛 같은 놀라운 사람”이라고 전했다. 바크코위악은 최근 뒤늦게 약혼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늘 건강하게 지내려 애 썼으며 약 한 달 전에 남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나 대화를 나눴다.

수전 포츈 씨는 1990년대 초 배우로도 활동했다. 최근에는 자신의 집 정원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고 그의 정원에는 토마토, 상추, 바질 등이 가득 자랐다고 이웃들은 전했다. 그는 정원에서 수확한 것들을 옆집에 자주 나눠줬다. 최근에는 자신이 심은 복숭아 나무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의 이웃들은 초저녁이면 포츈 씨가 마당에 나와 노을을 바라보며 앉아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는 아들 나다니엘을 기르며 20년 간 한 집에서 살았다.

희생자 에릭 탤리.
희생자 에릭 탤리.
앞서 사연이 알려진 11년차 베테랑 경찰 탤리는 참사 현장에 맨 먼저 출동했다가 변을 당했다. 마리스 해롤드 볼더 경찰서장은 그를 ‘영웅’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7살 막내와 20살 맏이를 포함해 7자녀를 둔 아버지였다. 그는 클라우드 통신 분야에서 일하다 40세에 뒤늦게 경찰에 입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아버지는 “모든 아이들이 경찰이 되고 싶어하지만 텔리는 특히 더 그랬다”고 말했다. 또 “이 세상은 위대한 영혼을 잃었다”고 한탄했다. 그의 누이 크리스틴은 트위터에 “그가 얼마나 아름다운 아이었는지, 이 상실은 얼마나 슬픈지 형언할 수 없다”며 “나의 어여쁜 동생아, 늘 파일럿이 되고 싶어했잖니. 이제 훨훨 날아가렴”이라고 애도했다.

조디 워터스의 사연도 알려졌다. 미 지역 언론 덴버포스트에 따르면 아리조나대를 졸업한 그는 볼더에 오랫동안 살았으며, 볼더 펄 스트리트 쇼핑몰에서 가죽옷을 판매하는 ‘엠브라지오’를 운영했다. 그는 일리노이 출신으로 두 딸이 있다. 주디 엠바일 콜로라도주 의원(민주당)은 “예전에 쇼핑을 하다가 워터스 씨의 상점에 들러 그를 알게 됐다”며 “당시 매우 활기차고 유머러스했다”고 전했다. 워터스의 지인들은 그를 “따뜻한 가슴을 가진 아름다운 영혼이었다”, “내가 아는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 등으로 전했다.

이은택 기자 na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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