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인 비서실장이 가장 먼저 사표?” 그리셤이 백악관 떠난 이유는…[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정미경 기자 입력 2021-01-12 14:00수정 2021-01-1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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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라니아 패션잡지 표지모델 ‘실종’
의회 난입과 무슨 관련?
시위대의 국회의사당 난입으로 풍비박산이 난 미국 도널드트럼프호(號)에서 각료와 참모들의 탈출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뛰어내린 사람은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를 보좌해온 스테파니 그리셤 영부인 비서실장.
퍼스트레이디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오른쪽)의 비서실장을 지내다가 의회 난입 사건 직후 물러난 스테파니 그리셤(왼쪽). NBC

그녀는 난입 사건이 벌어지고 난지 2시간 뒤 “물러나겠다”고 밝혔습니다. “영부인 비서실장이 가장 먼저 사표?” 많은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죠. 평소 멜라니아 여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국 운영과 거리를 둬왔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줄사표를 내려면 장관들이 먼저 움직이지 그리셤처럼 백악관 내부에서 일하는 참모들은 대통령 눈치를 보느라 좀 더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게 공통적인 시각이었습니다.

단 두 문장. 그리셤 실장이 CNN 등에 보낸 사임 성명은 매우 짧았습니다. “그동안 국가를 위해 봉사한 것은 영광이었다. 멜라니아 여사의 어린이돕기 운동을 비롯해 이 행정부의 업적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이었죠.

그러나 백악관 정치를 아는 이들은 “그리셤이 가장 먼저 떠날 줄 알았다”며 착잡한 표정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녀는 트럼프 대통령의 미움을 감수하고 직언해온 참모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죠. 그리셤 같은 소신파가 백악관에는 드물었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대통령의 비정상적 국가 운영을 묵인하고 동조했던 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파 참모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백악관 공보국장 시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왼쪽)을 보좌했던 그리셤(오른쪽). ABC

몇 달 전 멜라니아 여사를 둘러싼 ‘태틀러 커버 실종사건’은 그리셤의 성향을 잘 보여줍니다. 태틀러는 영국의 유명한 패션가십 잡지입니다. 멜라니아 여사는 지난해 태틀러 11월호와 단독 인터뷰를 했습니다. 대선을 코앞에 둔 시점에 선거홍보성 인터뷰였죠. 그런데 멜라니아 인터뷰가 실린 11월호 표지모델은 메건 마클 영국 왕손빈. 미국 퍼스트레이디 정도를 인터뷰했으면 당연히 커버도 장식하는 것이 관례입니다. 하지만 태틀러 표지에는 대문짝만한 메건 마클 사진과 함께 멜라니아 인터뷰는 안내문구 정도만 실렸습니다.

당시 태틀러 인터뷰를 성사시킨 것이 바로 그리셤 실장이었습니다. 태틀러 측은 그리셤이 인터뷰 계약만 했지 표지모델 계약은 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미국의 많은 친(親)트럼프 전문가들은 그리셤에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커버 모델도 못 된 인터뷰라니 퍼스트레이디 위신이 뭐가 되느냐” “수많은 미국 언론을 놔두고 왜 표도 안 되는 영국 매체와 인터뷰했느냐”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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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셤 실장은 이런 공격에 대꾸하지 않았지만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은 얘기에 따르면 “이런 때일수록 멜라니아 여사와 트럼프 대통령을 덜 부각시켜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녀는 “트럼프 대통령의 대선 캠페인이 극우화되면서 일반 대중과의 괴리감이 커지는 상황에서 멜라니아 여사가 멋진 옷을 차려입고 환하게 웃는 표지모델로 등장하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다”고 설명했다고 합니다.
메건 마클 영국 왕손빈이 표지모델로 등장한 2020년 11월호 영국 잡지 태틀러. 멜라니아 여사 인터뷰 안내 문구가 왼쪽 위편에 실려 있다. 태틀러 홈페이지

그러고 보면 흔히 ‘신비주의’라고 불리는 멜라니아 여사의 영부인 활동 자제 스타일이 이해가 됩니다. 모델 출신이니 딸 이방카 백악관 선임보좌관처럼 앞에 나서 활동할 줄 알았는데 대통령 사저가 있는 이스트윙에서 비교적 조용하게 지냈습니다. 멜라니아 여사를 백악관 입성 초기부터 보좌해온 그리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교양이 넘치고 미스터리한 분위기의 재클린 오나시스 케네디 여사를 동경해온 멜라니아 여사의 개인적 취향과 딱 맞아떨어지는 것이기도 했죠.

그리셤 실장은 멜라니아 여사의 추천으로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보좌하기도 했습니다. 2019년 7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대통령의 이미지 작업을 총괄하는 백악관 공보국장 겸 대변인을 맡았습니다.

공보국장 시절 그리셤은 또 다른 인터뷰 사건으로 백악관을 발칵 뒤집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WP) 부편집인이 트럼프 대통령을 인터뷰한 사건이었죠. 1회 인터뷰가 아니라 백악관 집무실에서 18회에 걸쳐 심층 인터뷰를 했는데요, 그 결과물이 지난해 9월 발간된 우드워드의 ‘격노(Rage)’라는 책입니다. 솔직히 이 책은 내용 자체보다 트럼프 대통령이 그동안 맹비난해왔던 “거짓 언론”의 정점인 WP와 장시간에 걸쳐 인터뷰를 했다는 사실이 더 큰 화제였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트럼프 대통령에게 우드워드와 인터뷰하도록 설득한 사람이 그리셤이었습니다. “대통령의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면 WP 같은 매체와 소통의 채널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고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왼쪽)을 인터뷰하는 밥 우드워드 워싱턴포스트 부편집인(오른쪽에서 두 번째). 이 인터뷰는 그리셤 당시 백악관 공보국장의 주선으로 이뤄졌다. CNN

MAGA파가 대세인 백악관에서 그리셤 같은 인물이 쉽게 살아남기 힘들겠죠. 그녀는 9개월간의 짧은 백악관 공보국장·대변인직에서 물러나 영부인 비서실장에만 전념하게 됩니다. 원래 자리로 돌아가서도 그녀의 기질은 여전했습니다.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으로 트럼프 대통령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멜라니아 여사의 문병 문제가 관심사로 떠오르자 그리셤은 “전염 위험 때문에 안 간다”고 딱 자른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아픈 남편을 극진하게 돌보는 아내’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던 트럼프 충성파들은 또 한 번 그리셤에게 불만을 터뜨렸다고 합니다.

지금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에 은둔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의 정신 상태가 점점 불안정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진작 그리셤 같은 부하들의 말에 좀 더 귀 기울일 걸…”하는 회한에 잠겨있을까요. 그럴 것 같지는 않아 보입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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