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에 드리운 전쟁 그림자…9·11 키즈의 삶은 기구하다? [정미경 기자의 청와대와 백악관 사이]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9월 16일 14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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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과거의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매우 드물게 또렷하게 기억하는 과거의 순간이 있습니다.

2001년 9월 11일 늦은 저녁. 이날이 무슨 날인지는 아실 겁니다. 다들 하던 일을 멈추고 TV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한동안 잠을 못 이루셨을 겁니다.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도 아니지만 그 비주얼적인 충격인 어마어마했죠.

9·11 테러는 미국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아침에 벌어졌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무너져도 태어날 아기는 태어나는 법. 이날 미국에서 1만3238명의 아기가 탄생했다고 합니다. 이날, 아니 정확히 이날은 아니어도 그 주변 달(月)에, 해(年)에 출생한 아기들까지 모두 합쳐 ‘9·11 키즈’라고 부르죠.

9·11테러 후 무너져내린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앞 모습. 폴리티코
9·11테러 후 무너져내린 미국 뉴욕 세계무역센터앞 모습. 폴리티코


요즘 미국에서는 ‘9·11 키즈의 기구한 삶’이 화제입니다. 사실 ‘기구하다’는 약간 적절치 못한 표현인 듯 해서 ‘드라마틱하다’ 정도로 해두겠습니다.

9·11 키즈의 상당수는 올해로 19년을 살았습니다. 특히 올해 주목을 받는 것은 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때이기 때문입니다. 대학에 진학했을 수도 있고, 직장에 취직했을 수도 있고, 다른 꿈을 꾸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성인이라는 카테고리에 들게 됐고 선거권을 행사하게 됐습니다.

9·11 키즈의 상당수는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라는 관문에 들어섰다. 미국 젊은이들의 모습. CNN
9·11 키즈의 상당수는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라는 관문에 들어섰다. 미국 젊은이들의 모습. CNN


9·11 키즈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요. 개인적인 인생이야 모두 다를 것이니 그 인생에 영향을 미친 사회적 환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부모로부터 “너는 9·11 때 태어났어”라는 말을 귀가 따갑도록 들으면서 자랐겠죠. 이는 “중요한 때 태어나서 좋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까지 살던 세상과는 달라. 조심해서 살아야 한다”는 염려의 메시지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9·11 테러 후 미국은 많이 변했습니다. 이라크 전쟁을 시작했고, 아프가니스탄도 침공했습니다. 다시 일상생활에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운 것이죠. 하지만 이거야 다른 나라 땅에서 지지고 볶고 전쟁을 치른 것이니 대단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2007~08년 주택시장 붕괴로 인한 금융위기는 기업 파산과 실업 양산으로 이어지면서 우리나라의 국제통화기금(IMF) 사태 급 충격을 미국인들에게 안겨줬습니다.

버락 오바마 시대에 접어들면서 미래를 꿈꾸는가 싶었지만 인종차별, 총기난사, 약물남용 등의 내재적 문제점들은 더욱 깊어만 갔죠. 이후 도널드 트럼프 시대의 분열상은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여기에 9·11 키즈는 성인으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시점에 신종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결정적 충격을 맞게 됩니다.

9·11 키즈 상당수는 이제 대학생이 됐다.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된 미국 대학 캠퍼스 모습. CNN
9·11 키즈 상당수는 이제 대학생이 됐다.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크 착용이 일상화된 미국 대학 캠퍼스 모습. CNN


그렇다고 9·11 키즈의 삶이 비관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스마트폰에서 페이스북, 틱톡까지 이들만큼 정보통신(IT) 신세계의 혜택을 온전히 누리면서 살아온 세대는 드뭅니다. 또 최근 미국에서 벌어진 인종차별 반대시위의 30~40%는 9·11 키즈를 포함한 Z세대(1990년대 말~2000년대 초 태어난 세대)였을 만큼 사회적으로도 목소리를 낼 줄 압니다. 정신적으로 고립됐다거나 세상 한탄만 하는 젊은이들이 아니라는 것이죠.

역사적인 사건들을 인생의 변곡점마다 부딪혀온 9·11 키즈의 삶을 ‘기구하다’거나 ‘드라마틱하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정확한 지적이 아닐지 모릅니다. 누구보다 많은 것을 경험해 그 어떤 세대보다 ‘성숙하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일 듯 싶습니다.

정미경 기자mi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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