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4월 17대 총선이 며칠 남지 않았을 때다.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정동영 의장이 선거운동을 하다 "60, 70대 유권자들은 투표를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20, 30대 젊은 유권자의 투표를 촉구하다 나온 실수였다. 그러나 이 발언은 이른바 '노인 폄하 발언'으로 비화해 노년층 유권자의 분노를 샀다. 정 의장은 이튿날 즉각 공개 사과를 하고, 전국 노인정을 찾아 큰절로 용서를 구했지만 역풍은 거셌다. 결국 국회의원 전체 299석 중 200석 이상을 석권하리라던 열린우리당은 152석을 차지하는데 그쳤다.
이와 같은 일이 총선을 8일 앞둔 영국에서도 벌어졌다. 집권 노동당의 고든 브라운 총리가 28일 선거운동 도중 여성 유권자에게 "꽉 막힌 여성(a bigoted woman)"라는 험한 말을 해버린 것이다. 브라운 총리는 즉각 이 여성을 찾아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지만 노동당은 이번 '말실수'가 선거 결과에 악영향을 미칠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더타임스를 비롯한 영국 언론에 따르면 브라운 총리는 이날 그레이트맨체스터 지역 로치데일에서 주민들을 만나며 선거운동을 벌였다. 브라운 총리의 한 보좌관이 빵을 사가지고 오던 66세 여성 질리언 더피를 총리에게 소개했다. 연금생활자인 더피 씨는 자신을 노동당 지지자라고 소개했다. 둘은 재정적자, 교육, 그리고 이민 문제를 놓고 5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뒤 헤어졌다. 브라운 총리는 "만나서 반가웠다"며 인사했고, 더피 씨는 주위의 기자들에게 "좋은(nice) 사람이다. 그를 지지하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브라운 총리는 전용차에 타자마자 옆자리 전략공보국장을 향해 "이번 대화는 재난(disaster)이었다"며 "좀 꽉 막힌 여성(a bigoted woman)이야. 자기가 노동당 당원이었다고 하는데 말도 안 돼(ridiculous)"라고 했다. 차 안의 은밀한 대화로만 생각했던 브라운 총리는 자신의 셔츠에 뉴스전문 케이블방송 스카이뉴스가 취재를 위해 무선 핀 마이크를 달아놨다는 사실은 깜박 잊었다. 브라운 총리의 육성은 전파를 타고 영국 전역에 퍼졌다.
이날 일정에 따라 BBC 라디오2의 한 방송에 출연한 브라운 총리는 녹음된 자신의 말실수를 들었다. 그는 당혹함과 부끄러움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리면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더피 씨에게 전화를 걸어 사과를 했다. 이날 브라운 총리가 한 여섯 번의 사과 중 첫 번째였다. 29일 저녁에 있을 마지막 TV토론 준비에 바쁘던 노동당은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기자회견을 열어 공개사과를 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브라운 총리는 더피 씨의 집으로 찾아가겠다고 고집했다.
당황하기는 더피 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집으로 찾아온 기자들에게 "총리가 그런 말을 했을 리가 없다"고 했지만 녹음테이프를 듣자 "소름이 끼친다"고 말했다. 그는 "나라를 이끌어야 할 분이 평범한 여성에게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며 분개했다.
브라운 총리는 더피 씨 집에서 더피 씨와 40여분 사적인 대화를 했다. 혼자 더피 씨의 집을 나서면서 브라운 총리는 "깊이 뉘우쳤고 용서를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피 씨는 브라운 총리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일부 언론은 "만약 용서를 했다면 둘이 같이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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