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정권을 몰아내고 출범한 키르기스스탄 과도정부를 놓고 미국과 러시아가 미묘한 입장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중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두 강대국의 각축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축출된 쿠르만베크 바키예프 대통령이 사임을 거부하고 과도정부와 맞설 의사를 밝히면서 긴장감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
○ 공군기지 둘러싼 미-러 신경전
미국은 로자 오툰바예바 수반이 이끄는 과도정부와 바키예프 대통령 중 어느 편도 들지 않고 신중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8일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경찰과 시위대의 ‘치명적인 폭력(deadly force)’을 개탄한다”며 “인권과 민주주의 원칙이 지켜지기를 바란다”는 원론적 성명만 발표했다. 필립 크롤리 국무부 공보담당 차관보는 오툰바예바 수반을 “야당 지도자”라고 언급해 과도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을 시사했다.
반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과도정부가 출범선언을 한 뒤 오툰바예바 수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지지 의사를 밝혔다. “러시아는 인도적인 지원을 할 의사가 있다”고도 했다. 친러시아 성향의 과도정부는 9일 모스크바로 대표단을 급파해 이에 호응했다.
이런 견해차의 배경에는 키르기스스탄에 위치한 미군의 마나스 공군기지가 있다. 이 기지는 러시아로부터 끊임없는 폐쇄 압력을 받았다. 러시아는 옛 소비에트연방이었던 이 지역에 칸트 공군기지를 세워 미국을 견제해 왔다. 이번 사태 직후에는 칸트 기지에 공부수대 150명을 추가로 파병했다.
마이클 맥펄 백악관 러시아 담당 고문은 “이번 사태를 미-러 간 대리전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시위가 러시아의 지원을 받지 않았으며, 반미주의자들의 쿠데타도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오툰바예바 수반도 “마나스 미군기지는 유지될 것”이라고 확인했다. 일시 폐쇄됐던 마나스 기지는 9일 오후부터 정상화됐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그러나 양국의 부인에도 이를 둘러싼 힘겨루기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두 정상이 키르기스스탄 사태에 대한 공동성명 발표를 논의했으나 무산된 점은 이를 단적으로 드러내는 사례다.
○ 바키예프 “외부 세력 개입했다”
긴급 피신한 바키예프 대통령도 “외부의 세력이 개입하지 않고는 이런 시위가 일어날 수 없다”며 러시아를 겨냥했다. 그는 성명을 내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며 대통령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며 사임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는 현재 자신의 정치적 근거지인 남부 잘랄아바트에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그가 남부 세력을 결집해 정국을 남북 대치 상황으로 몰고 가려 한다는 전망이 나온다.
한편 과도정부는 피신한 바키예프 대통령이 국가금고에 보관된 자금을 다른 곳으로 빼돌렸다며 국가금융시스템을 동결한다고 밝혔다. 현재 국가금고에 2200만 달러만 남아 있다는 것. 과도정부 관계자는 “바키예프 대통령이 자금을 해외로 빼돌릴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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