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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9년 5월 11일 02시 5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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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미국 은행들의 국유화는 불가피하다. 미래 세계 금융의 중심이 뉴욕에서 워싱턴으로 옮아가고 있다.”
미 투자전문가 엘리슨 엘리엇 씨는 8일 결과가 발표된 정부의 은행 스트레스 테스트를 두고 미 외교정책연구소(FPA) 블로그에 이런 쓴소리를 쏟아냈다. 10개 은행이 700억 달러가 넘는 자본을 새로 확충하는 과정에서 정부 개입이 불가피하고, 이는 결국 금융업계 전반에 대한 정부의 영향력 확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논리다. 최대 주주가 정부로 바뀐 제너럴모터스(GM) 등 자동차를 포함해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을 받는 각종 산업 분야에서도 국유화 논란이 한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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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 전문가들은 최근 이런 현상을 ‘국가자본주의(state capitalism)’라는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우리 식으로 말한다면 과거 ‘박정희 경제모델’처럼 국가가 주요 기업을 직접 관리하고 경제를 통제하는 시스템이다. 경기침체로 보호무역주의 장벽이 높아지고 경쟁과 효율만을 강조하는 영미식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가 잇따르면서 문제를 조정하고 통제하는 과정에서 국가와 정부의 목소리가 커지는 국가자본주의의 흐름이 거세지는 추세다.
○ “자유시장 기본 논리까지 흔들”
정치경제 컨설팅회사인 뉴욕 유라시아그룹 이언 브레머 대표는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최신호에 기고한 글에서 “국가자본주의가 부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세계 각국에서 경제와 기업 활동에 대한 정부 개입이 잇따르면서 자유시장의 기본 논리까지 흔들리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에 따르면 1970년대 석유파동 때 부상한 국가자본주의의 개념은 러시아 등 1980년대 권위주의적 신흥 경제대국의 성장, 2005년 중동과 중국 등을 중심으로 한 국부펀드의 확산을 거치며 이미 3차례 부침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유시장 옹호의 선봉에 섰던 서구 선진국까지 동참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는 분위기라는 점에서 과거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은 물론 유럽과 호주, 일본 등도 이 대열에 경쟁적으로 동참하고 있다.
지난해 금융위기 이후 높아진 보호무역주의와 폐쇄주의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러시아 정부는 42개 ‘전략 분야’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제한한 데 이어 자동차는 물론 닭고기와 돼지고기 수입에 대해서까지 관세를 추가했다. 인도네시아는 500종류 이상의 수입품에 대해 규제를 강화했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인도 역시 와인과 섬유, 콩기름 같은 소비재 수입에 대한 추가 규제를 시행했거나 검토 중이다. 국민이 이용하는 은행 창구에서부터 전기, 가스 자동차, 음식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경제 및 소비활동에 개입하는 정부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셈이다.
○ 커지는 국가 파워
국가자본주의를 떠받치는 힘은 정부가 통제하는 거대 기업에서 나온다. 현재 세계 최대 정유회사를 포함해 전 세계 에너지 관련 기업의 75%가 국영이다. 예를 들어 러시아 가스프롬, 사우디아라비아 사우디아람코, 이란 국영석유공사(NIOC), 브라질 페트로브라스, 중국 천연석유가스공사(CNPC) 등이 글로벌 에너지 수급 문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철강과 해운, 무기 제조, 중장비, 통신, 항공 같은 국가 주요 산업 분야에서도 각국 정부가 시장 규제를 넘어 직접 경영에 간섭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한편 국부펀드는 국가자본주의를 강화하는 정부의 또 다른 무기다.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해 말 “금융 산업이 회복되면 국부펀드의 활동은 과거보다 더 활발해질 것”이라며 이것이 가져올 국가자본주의의 확대 가능성을 언급했다. 이미 국부펀드는 전 세계 펀드의 8분의 1을 차지하고 있다. 세계 금융시장 시스템을 흔들기에 충분하다. ‘매킨지 글로벌 인스티튜트’는 보고서를 통해 아시아에서만 2007년 말 4조6000억 달러에 이르는 국부펀드 규모가 경기 회복 시 2013년에는 최대 12조2000억 달러까지 늘어날 수 있다고 추정했다.
국가자본주의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우선 기업가와 정치인의 강한 유착관계가 형성될 수 있다는 우려다. 러시아 가스프롬의 경우만 해도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과거 회장이었고, 현 회장은 미하일 프라드코프 전 총리다. 이럴 경우 경제논리보다 정치논리가 앞서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비효율과 관료주의, 부패 등의 문제를 낳을 가능성이 높다. 미국의 법률전문지 ‘내셔널 로 저널’은 최근 “정부와 기업논리가 다르기 때문에 계약 위반 등 글로벌 법적 분쟁이 늘어날 가능성도 높다”는 전망을 내놨다.
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노지현 기자 isityou@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