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김순덕]태국의 빨·노·파

  • 입력 2009년 4월 14일 03시 01분


이번엔 빨간 옷이다. 태국에서 탁신 친나왓 전 총리를 지지하는 반(反)정부 시위대가 빨간 옷을 입고 나섰다. 지난 주말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3(한중일)’ 정상회의를 무산시킨 데 이어 방콕 시내 곳곳을 해방구로 만들고 정권 퇴진과 탁신 귀국을 요구한다. 작년 말 정권이 바뀌기 전엔 탁신을 반대하는 반(反)정부 시위대가 노란 옷차림으로 공항까지 점거해 끝내 정권 퇴진 요구를 관철했다. ▷태국에서 노란색은 국왕의 상징이다. 작년 시위를 주도했던 현 집권당은 왕실과 이를 보위하는 군, 엘리트 관료와 기업가, 도시 중상층을 대변한다. 문제는 이들이 농촌과 지방 저소득층을 신뢰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이들의 ‘신(新)정치’는 1인 1표에 반대한다. 의회는 지명된 의원으로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골 사람들은 책임 있는 투표를 할 만한 지성과 지혜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쉽게 말하면 우중(愚衆)선거를 통해 또 탁신파가 다수당이 되고 탁신이 총리가 되는 꼴은 못 보겠다는 거다.

▷탁신은 2001∼2006년 재임기간에 연평균 6%가 넘는 경제성장을 이끈 ‘탁시노믹스’의 주인공이다. 농촌에 공짜나 다름없는 의료혜택과 교육, 부채탕감, 고용지원 등을 퍼부어 태국을 아시아에서 도농 격차가 줄어든 유일한 나라로 만들었다. 그의 포퓰리즘과 독재적 통치행태가 기득권 계층을 자극하지 않았을 리 없다. 때마침 드러난 부패와 불충(不忠)에 국왕이 돌아섰고, 2006년 9월 쿠데타로 쫓겨났다. 문제는 탁신을 원하는 유권자가 여전히 많다는 점이다. 이들이 이번에 빨간 옷을 입고 나선 것이다.

▷작년 쇠고기집회가 세종로를 해방구로 만들었을 때 뉴스위크는 ‘1폭도 1표(One Mob, One Vote)’란 기사에서 “민주 과잉이 국익을 해친다”고 했다. 과거 독재에 저항하던 식으로 무조건 거리로 뛰쳐나오는 건 미성숙한 민주주의라며 우리나라와 태국을 거론했다. 다행히 지금 우리나라에서 불법 폭력시위는 외면받고 있고, 1인 1표의 민주원칙은 굳건하다. 태국에선 빨간 옷이 사라지면 파란 옷(탁신에서 현 정권으로 돌아선 세력)이 등장할 판이란다. 어느 색이 옳은지 국외자가 판단하긴 어렵다. 결정은 거리가 아닌 투표장에서 하는 게 옳다.

김순덕 논설위원 yu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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