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송평인]선거보다 원칙 택한 獨사민당

  • 입력 2009년 2월 2일 02시 58분


“좌파당(Die Linke)은 경제적으로 무식하고 사회적으로 낭만적이다.”

프란츠 뮌테페링 독일 사민당(SPD) 당수가 최근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존타크스차이퉁과의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사민당의 현실주의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카를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은 1848년 독일 베를린에서 처음 출간됐다.

그 베를린에서 지난달 11일 약 1만5000명이 독일 공산당 지도자인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 사망 90주년 추모 시위에 참가했다.

두 사람은 1914년 SPD를 탈당해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조직했다. 1919년 스파르타쿠스 동맹을 독일 공산당으로 개조하고 소비에트 혁명을 목표로 봉기를 일으켰으나 1월 15일 체포돼 즉결 처형됐다.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운하에 버려져 4개월여 후에 발견됐다.

옛 소련과 동독의 공산주의가 붕괴되자 극좌파의 향수는 더 먼 과거로 향했다. 룩셈부르크는 혁명의 꽃으로 살아났다. 소련과 동독이 붕괴된 직후 이들의 추모 시위에 10만 명까지 참가했다.

공산당 잔당과 극좌파로 결성된 좌파당에 과거 룩셈부르크처럼 SPD에서 탈당한 오스카어 라퐁텐이 공동당수를 맡고 있다.

SPD는 늘 극좌파와 싸웠다. 룩셈부르크 시대의 SPD 이론가 카를 카우츠키는 마르크스 레닌주의 혁명가들에게 배신자로, 기회주의자로, 개량주의자로 낙인찍혔지만 공산주의로부터 사민주의를 지킨 그가 없었다면 SPD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달 1년 만에 다시 벌어진 헤센 주 의회 선거도 SPD의 현실주의를 보여주는 한 편의 드라마였다.

본래 이 선거는 1년 전 SPD가 이겼던 것으로 SPD가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는 바람에 재선거에 들어가 기민당(CDU)이 공짜로 먹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일이 벌어졌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의 중도 노선을 잇는 뮌테페링 부총리가 SPD의 좌경화를 추구한 쿠르트 베크 당수와의 노선 경쟁에서 져 물러났다가 다시 베크 당수를 몰아내고 극적으로 당수직을 차지했다.

뮌테페링의 복귀에는 헤센 주의 상황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안드레아 입실란티 헤센 주 SPD 위원장은 지난해 선거에서 좌파당과의 연정은 없다고 공약하고 선거에 이겼으나 녹색당과의 연정만으로는 정부를 구성할 수 없게 되자 좌파당과도 연합을 모색했다.

이에 다그마어 메츠거 등 사민당 헤센 주 의원 4명이 공약을 저버리는 일이라며 끝까지 좌파당과의 연합에 반대했다. 이들의 반대로 결국 SPD가 선거에서 이겨놓고도 표가 모자라 정부를 구성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결국 재선거를 하고 CDU에 승리를 돌려줬으니 이들은 당에 배신자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런 낙인도 좌파당과 손잡는 것은 사민당을 망하게 하는 길이라는 신념을 꺾지 못했다.

이들의 반란은 근거가 있었다. 1960, 70년대 극좌파의 폭력성을 잘 아는 양식 있는 독일 유권자에게 극좌파는 공산당 못지않게 위험한 사람들로 취급된다. 실제 SPD의 지지도가 크게 하락했고 입실란티 위원장을 지지한 베크 당수는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SPD는 뮌테페링 당수의 취임으로 1년 만에 다시 슈뢰더 전 총리의 개혁 노선을 잇는 정당으로 돌아왔다. 올 9월 총선을 앞둔 SPD는 자기들끼리 싸워도 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상황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정권을 내주면서까지 유권자와의 공약을 지킨 4명 의원의 책임감은 놀라울 뿐이다.

송평인 파리 특파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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