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혁20년’ 동유럽을 가다]<4>일류국가 도전 나선 헝가리

  • 입력 2008년 1월 19일 03시 03분


물건-사람 넘치는 상점체제 변화를 두고 헝가리인들은 ‘부족함’의 전환이 이뤄졌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상점의 부족’에서 ‘주머니의 부족’으로 전환이 이뤄졌다는 것. 공산 시절에는 상점에 물건이 없었지만 이젠 빈부격차가 생기면서 물건을 살 수 없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빗댄 농담이다. 이런 우스개에도 불구하고 연말연시를 맞은 부다페스트 시내의 쇼핑몰에는 물건과 이를 사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부다페스트=김영식 기자
물건-사람 넘치는 상점
체제 변화를 두고 헝가리인들은 ‘부족함’의 전환이 이뤄졌다는 우스갯소리를 하곤 한다. ‘상점의 부족’에서 ‘주머니의 부족’으로 전환이 이뤄졌다는 것. 공산 시절에는 상점에 물건이 없었지만 이젠 빈부격차가 생기면서 물건을 살 수 없는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이 생겨났다는 것을 빗댄 농담이다. 이런 우스개에도 불구하고 연말연시를 맞은 부다페스트 시내의 쇼핑몰에는 물건과 이를 사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부다페스트=김영식 기자
“유로존 가입 그날까지…” 내실 다지기 ‘긴축 또 긴축’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동상 공원’. 마르크스와 레닌 등 공산주의 상징 인물들의 동상과 석상 40여 점이 모여 있다. 이 공원은 공산주의의 승리가 아닌 ‘몰락’을 상징하는 장소다. 한때 부다페스트 곳곳에서 시민들을 내려다보던 조형물들을 체제 변혁 후 한데 모았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의 폐해를 잊지 않겠다는 헝가리인의 굳은 의지를 보여 준다. 부다페스트의 중부유럽대에서 사회학을 공부하는 미국인 제시카 풀턴(20·여) 씨는 겨울방학에 맞춰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 포르네(42) 씨와 동상들 사이를 누비며 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풀턴 씨는 “공산통치 기간에 혁명의 희망을 상징했던 이 동상들이 지금은 ‘외롭다’고 말하는 듯한 기묘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그는 “헝가리인은 마치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가 아직도 다른 세상에 있다고 생각하는 듯 체제 전환에 열정적”이라고 헝가리 사회의 기류를 설명했다.

○ 성공하면 단숨에 경제 도약

“단숨에 경제 도약을 이루느냐, 경제 위기의 직격탄을 맞고 추락하느냐.”

2004년 유럽연합(EU)에 가입한 헝가리는 지금 국운을 건 또 하나의 승부를 준비 중이다. 바로 유로존(Euro zone·유로화 사용국) 가입이다.

2006년 4월 총선에서 승리한 집권 사회당의 페렌츠 주르차니 총리는 재집권에 성공하자마자 재정 적자 축소를 최대 과제로 내세웠다. 유로화 사용권에 편입되기 위해서는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규정하는 재정 적자 3% 유지 등 각종 거시지표를 준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1차 목표는 2, 3년 내에 유로존에 들어가는 것.

2006년 6월 초엔 대대적인 긴축 재정정책을 내세우며 기존 17개 부처를 11개로 축소하고 공무원 감축에 나섰다. 그러나 생각만큼 간단치는 않았다.

긴축 재정으로 투자가 줄어들자 2007년 성장률이 1.5%(예상치)로 뚝 떨어졌다. EU 평균 3.0%의 절반에 불과한 수치다. 체제 전환을 겪은 국가들이 발전 정도가 다른 서유럽의 경제 수준과 규범에 맞추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준다.

헝가리의 실험은 성공하면 단기간에 유럽 국가 수준으로 일어설 수 있는 기회이지만 실패하면 인플레이션과 환율 폭락이라는 암초에 부딪힐 수 있는 모험으로 일컬어진다.

두나(다뉴브) 강 동쪽 페스트 지역의 바치우트처 거리에서 만난 보르고 자네트(27·여) 씨는 “정부의 개혁정책에 따라 연금 의료지원 무상교육 등 국민 복지정책이 축소되고 있다”며 “체제 변화 이후 지속되는 개혁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경제일간지 빌라거즈더샤그의 일로나 코슈치 편집인은 “긴축 재정으로 경기가 다소 침체됐지만 2009년부터는 다시 성장 궤도에 진입할 것”이라며 “일반 국민에게는 불편이 있지만 기업인들은 유로존 가입이 장기적으로 이익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고 낙관적인 전망을 밝혔다.

한편으로 긴축 재정은 국가 경제를 건실히 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헝가리의 2006년 국내총생산 대비 재정 적자 규모는 무려 10.1%에 이른다.

헝가리 한화은행 백대욱 행장은 “인구 1000만 명 정도에 경제 규모도 상대적으로 작은 헝가리가 재정 적자를 방치하고 투명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국가 부도 사태로 이어질 수도 있다”며 “현재는 긴축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 공산주의 절연에 대한 강한 의지

헝가리 정부가 유로존 가입에 매달리는 것은 한편으로 EU로의 완전한 통합 시기를 앞당기겠다는 열망을 상징한다. 이 같은 열정은 공산주의 때문에 상실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이 주변국들에 비해 한층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재무부 장관을 지낸 벨러 카다르 헝가리 경제학회장은 헝가리 정부의 신속한 유로존 가입 노력에 경제적 이유뿐 아니라 사회심리적 측면도 크게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헝가리인은 EU에 가입한 뒤에야 비로소 ‘원래 우리가 속했던 서구사회의 해안’에 상륙했다는 안도감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특히 1956년 10월 헝가리 봉기가 소련군의 유혈 진압으로 좌절된 경험은 공산주의에 대한 염증과 서유럽에 대한 동경을 극대화하게 된 결정적 계기로 꼽힌다.

당시 2500명 이상의 시민이 사망했고 임레 너지 총리는 소련에 의해 처형됐다. 12년 뒤 체코 ‘프라하의 봄’ 당시에도 바르샤바조약군의 침공이 있었지만 사상자가 거의 없었고 둡체크 공산당 서기장도 해임에 그쳤던 것과 크게 대비된다.

○ 대외 개방 “이념적 경계를 초월”

최근 헝가리와 폴란드 등의 정치권에서는 흥미로운 현상이 엿보인다. 우파 정당들이 보호주의 정책을 내세우는 포퓰리스트(대중영합주의자) 성향을 보이는 반면 좌파가 오히려 대외 개방에 적극적인 색깔을 띤다는 점이다. 유로존 편입에 다걸기 한 헝가리 집권당이 사회당이란 점이 이를 웅변한다.

안드레아 세고(여) 부다페스트 경영대 사회학과 교수는 “헝가리도 체제 전환 초기에는 국제 경제와 민주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결과 한동안 나라 전체가 소모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에 휩싸였다”며 “그러나 체제 전환 20년을 거치면서 이제 시대착오적인 이데올로기 대립 구도는 극복됐다”고 말했다.

세고 교수는 “유로존 가입에 매진하는 지금이 헝가리에는 도전의 시기”라며 “체제 전환 초기의 혼란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로존 가입 이후 헝가리가 국제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과 도덕적 규범을 확립하는 작업이 급선무”라고 강조했다.

부다페스트=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긴축은 건전재정 위한 올바른 선택”

에버 코핀트타르키 경제硏 소장

헝가리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코핀트타르키 경제연구소(1964년 설립)의 펄로츠 에버 소장은 “체제 전환 국가들은 점진적인 변화와 충격요법 가운데 하나를 선택했지만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나 충격이 굉장히 컸으며 신속한 변화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체제 전환 과정에서는 어떤 어려움이 가장 컸나.

“옛 공산권 국가들은 소련이 이끈 공산권 경제협력기구 경제상호원조회의(COMECON·코메콘)의 중앙계획경제 시스템 아래서 기능적으로 움직였다. 국가별로 산업분화가 이뤄졌고 서로가 서로에게 시장이었기 때문에 공산주의가 몰락한 뒤 모두가 시장을 잃었다. 결국 공산주의 시절 어떤 산업을 갖고 있었는지, 민영화를 어떻게 진행했는지에 따라 국가별로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헝가리는 체제 전환 5년 만인 1995년에 민영화를 85%까지 이룰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코메콘 체제에서 헝가리의 역할은 어떤 것이었나.

“헝가리는 경공업과 섬유 등의 부분을 맡았다. 정보 관계 산업과 계측기 및 디지털 칩도 생산했다. 다만 코메콘 회원국끼리 무역을 하면서도 돈이 오간 게 아니라 장부상 기록만 남겨두는 방식이어서 경제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했다.”

―헝가리는 어떤 방식으로 민영화를 진행시켰나.

“직접 기업을 매각하거나, 증권시장에 상장하거나, 국영기업에서 일하던 사람의 소유권을 인정해 지분을 나눠주는 형식 등 세 가지 방식을 적절히 활용했다.”

―현재 헝가리 경제상황을 어떻게 평가하나.

“2006년 총선 후 실시된 긴축정책으로 인해 1.5% 선의 저성장을 하고 있다. 긴축재정이 아니었다면 4∼5% 선에 이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채무와 재정 적자 때문에 지금의 방향은 내실을 기하는 올바른 선택이라고 본다.”

―낮은 성장률을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유로존 가입 조건을 맞추기 위한 긴축재정정책은 향후 2년 반 이상 지속돼야 한다. 기업의 사업자금 확보 어려움에 대한 우려도 나오지만 전반적으로 긴축 기조를 감내할 여력이 충분하다고 본다.”

부다페스트=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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