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시는 나쁜 사마리아인? 美 ‘중산층 붕괴’ 논란

  • 입력 2008년 1월 2일 02시 52분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고자 한 온정적 보수주의자들.”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의 핵심 인사들은 훗날 역사가들이 ‘부시 시대’의 이념을 이렇게 기록해 줄 것을 바란다고들 말한다.

자신들이 큰 틀에선 완고한 보수주의를 추구했지만 그와 동시에 ‘강도당한 이를 도와준 신약성서 속 착한 사마리아인’처럼 중산층 이하 계층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는 ‘온정이 넘치는 보수주의’를 지향했다는 설명이다.

그렇다면 감세(減稅)와 자유무역 정책을 추진해 온 부시 행정부 7년 동안 미국 중산층은 실제로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

최근 미국에선 ‘상당수 중산층이 빈곤층으로 전락할 위기에 처했다’는 위기론과 ‘일자리 창출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도 중산층의 기반이 탄탄하다’는 반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중산층은 와해되고 있는가=브랜다이스대 자산·사회정책연구소(IASP)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자산 교육성취 주거비용 가계예산 건강보험 등 5가지 요인을 종합 산정한 결과 중산층 가운데 재정적으로 안전한 상태인 가정은 31%에 불과하다”며 “특히 네 가구 중 한 가구꼴로 빈곤층으로 추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발표했다.

헨리 시스네로스 전 주택·도시개발 담당 장관도 “중산층이 계층 하락 위험을 안고 있으며 추락하면 다시는 재진입하기 힘든 상태”라고 말했다.

민주당 대선 주자인 존 에드워드 전 상원의원은 지난주 “미국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그리고 어떤 선택을 하는지가 자신의 삶의 조건을 결정한다’는 믿음에 근거해 이뤄진 나라인데 그런 사회적 약속이 위협받고 있다”며 중산층 위기론을 쟁점으로 부각했다.

“경제 호황과 닷컴 붐이 최상류층을 더 부유하게 만들었을 뿐 중산층의 삶의 질은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주장도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저명한 노동경제학 저술가인 스티븐 로스 씨는 지난달 보고서에서 “중산층 위기론은 정치적 목적으로 만든 허구”라고 반박했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1979년 이래 미국인의 1인당 소득은 65%가량 증가했으며 이는 가구당 연간 2만6000달러의 수입이 늘어난 것에 해당한다. 그런데 소득 분포상 중간 위치에 있는 가구의 수입은 같은 기간 1만8000달러가량 늘었다. 완전 균등하게 분배됐을 경우 늘어났어야 할 액수(2만6000달러)보다는 적지만 부의 분배가 그리 나쁘게 이뤄진 것은 아니라는 설명이다.

로스 씨는 중산층이 줄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연소득 3만∼10만 달러 가정이 30년 전보다 줄어들었지만 대신 10만 달러 이상 가정이 12% 늘어나고 3만 달러 미만 가정은 늘지 않았다”며 “중산층 규모 감소는 일부가 상류층으로 올라갔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세계화와 중산층 일자리=앨런 블린더 전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부의장은 “세계화의 피해 계층은 공장 이전으로 일자리를 잃는 블루칼라에 국한되지 않는다”며 “대부분의 사무·서비스 직종이 다른 나라로 옮겨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은 “1990년대의 일자리 해외 이전이 블루칼라에게 엄청난 시련을 주었듯 중산층에게도 그런 파도가 닥칠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미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반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로스 씨는 “지난 몇 년간 매주 100만 명꼴로 일자리를 잃었지만 매주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새로 일자리를 찾았다”며 “공장자동화와 공장 해외 이전이 빈번하니까 실직이 늘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만 실제론 중산층 고용 상황이 좋아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산층은 더 가난해졌나=브랜다이스대 연구팀은 “중산층 가운데 21%의 가정이 필수 지출만 해도 일주일 결산을 하면 남는 돈이 100달러 미만인 상태”라며 “대다수 중산층이 소득과 지출을 간신히 맞추는 빠듯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산층 가운데 갑자기 수입원이 끊겨도 9개월 이상 가계를 꾸려갈 수 있을 만큼의 자산을 축적한 가구는 13%에 불과하며 79%는 3개월도 버티지 못할 상태라는 분석도 나왔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을 감안해도 중산층 소득은 30년 전에 비해 4분의 1 이상 늘어났다는 반론도 나온다.

로스 씨는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가정이 교외에 ‘내 집’을 마련해 살고 있으며 고화질(HD)TV와 비디오게임, 자동차 시장은 갈수록 번성하고 있다”며 “하위 20%의 빈곤층 문제가 악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중산층의 삶의 질은 지속적으로 향상돼 왔다”고 주장했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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