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살아있다]제5장 만주 사변과 ‘만주국’ (상)

  • 입력 2007년 12월 24일 05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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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전역을 휩쓴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를 추구하는 기운이 세계적으로 고조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만주(満州)라 불리고 있던 중국 동북부에서의 권익 확보와 새로운 확대를 겨냥하여 무력적인 침략전쟁을 일으켰고 이것이 만주 사변(満州事変)이다. 이로 인하여, 중국 대륙에서 수렁 창에 빠진 듯 한 싸움이 시작되었고 미국과도 대립하게 된다.》

◆ 만주 사변 (満州事変)

일본이 중국 동북부(만주(満州))와 내몽고 동부를 침공한 전쟁. 사변 기간은 좁게는 1931년 9월 18일의 류타오후(柳条湖) 사건으로부터 1933년 5월 31일의 탕구(塘沽) 정전협정까지를 말한다. 넓게는 일중 전면 전쟁이 일어난 1937년 7월 7일의 루거우차오(盧溝橋) 사건까지를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9•18사변이라 부른다.

당시 일본 정부는 부전조약(不戦条約) 등의 국제법을 위반했다는 지적을 피하기 위해서 전쟁이 아니라, ‘사변’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일부러 내각결정을 내렸다.

일본은 러일 전쟁으로 얻은 뤼순(旅順), 다롄(大連) 등의 조차지와 남만주철도(만철)의 경영권을 ‘특수 권익’이라 부르며 중시했다. 이를 되찾으려는 중국 측의 움직임이 강해지면서, 일본이 상주시키고 있던 관동군이 펑톈(奉天)(지금의 선양(瀋陽)) 근교의 류타오후(柳条湖)의 만주철도선을 폭파하고는, “중국군이 폭파했다”라는 구실로 삼아 공격을 개시했다. 이를 류타오후(柳条湖) 사건이라 부른다. 관동군은 만주(満州)와 내몽고 동부의 영유를 목표로 했지만, 육군 중앙부가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청조(清朝) 마지막 황제 푸의(溥儀)를 앞에 세워 ‘만주국’을 만들고 정권을 조종했다.

◆ 릿톤 조사단

만주 사변을 조사하기 위해서 국제연맹이 파견한 조사위원회. 미▪영▪불▪독▪이태리의 5개국이 위원을 1명씩 선출했고, 영국인 빅터 릿톤 경이 위원장을 맡았다. 릿톤은 인도 총독의 아들로 벵갈 주지사 등을 지냈다.

조사단은 1932년 2월말부터 일중 양국을 돌면서, 같은 해 가을에 보고서를 작성했다. 일본의 군사 행동은 자위 조치로, 만주국이 자발적인 독립 운동으로 태어났다는 일본의 주장은 인정받지 못했다. 한편으로는 일본의 이익에도 배려를 하여, 연맹 주도 아래에서 일본을 중심으로 한 열국들이 지도하는 자치 정부 설치를 제안했다.

만주의 ‘진실’, 파란 봉투가 도착했다

비 오는 밤하늘에 소방차 사이렌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2007년 9월 18일 오후 9시 18분이었다. 이날 나는 중국 선양(瀋陽)시의 ‘9•18 역사박물관’앞에 서 있었다. 일 년에 한 번 선양(瀋陽)시에서 행사를 개최한다. 76년 전 이날 밤, 일본 군대가 갑자기 근처에서 무력 공격을 시작하여, 순식간에 중국 동북부의 광대한 지역을 지배했다. 기념식은 그 기억을 되살리고 평화를 기원하기 위한 것이다.

당시의 공습경보를 상기시키기 위한 사이렌이 3분간 울렸다. 광장에 모인 고교생과 병사, 무장 경찰관들은 비를 맞으면서도 직립 자세로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2일 후‘항일 전쟁’을 테마로 한, 가까운 푸순(撫順)시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뜻밖의 사람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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