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입력 2007년 11월 23일 03시 07분
공유하기
글자크기 설정
1923년 8월부터 1938년 10월까지 정치국 회의 내용이 그대로 기록된 문서가 70여 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미국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는 2003년 처음 비밀 파일의 존재를 알고 추적한 끝에 최근 1000쪽 분량의 회의록을 발굴했다.
폴 그레고리 후버연구소 연구원이 ‘후버 다이제스트’ 최신호에 내용 일부를 소개했다. 후버연구소는 이 자료를 내년에 러시아어 원본 3권과 영어 분석본 1권으로 출간할 예정이다.
러시아혁명 지도부는 정치국을 현인들의 지성소(至聖所)로 여겼다. 그러나 발굴된 기록은 스탈린이 최대 정적 레온 트로츠키와 통합반대파를 축출하는 과정에서 벌인 권력 암투를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기록에는 독설과 빈정거림, 위협이 그대로 남아 있고 ‘웃음’ ‘소란’ ‘야유’ ‘장내 들썩거림’ 등의 분위기까지 묘사돼 있다. 참석자들은 최종본이 나오기 전 자신의 발언을 검토하고 추가 또는 삭제할 수 있었지만 편집의 흔적도 그대로 남았다.
스탈린은 반대파를 비난하는 독설의 절반가량을 들어낸 뒤 자신의 성공담을 대신 채워 넣었고, 트로츠키는 자신의 발언을 2배 이상 늘려 놓기도 했다. 이처럼 회의록을 지나치게 편집한 것을 두고 벌인 논쟁까지 그대로 남았다.
기록 자체를 남기길 두려워하는 발언도 그대로 살아 있다. 1926년 비밀경찰 게페우(GPU) 책임자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트로츠키는 이런 논쟁을 벌였다.
▽제르진스키=우리가 나누는 얘기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범죄입니다.
▽트로츠키=우리가 얘기하는 사실에 대해서? 그렇다면 당신의 게페우에 우리가 더 얘기를 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을 내려야 할 거요. 그러면 일이 간단해지지.
서기장 스탈린은 당의 하부조직을 장악하고 있었다. 트로츠키와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의 반대파는 수세에 몰려 있었다.
트로츠키의 무기는 레닌이 남긴 유언이었지만 유언 공개는 불가능했다. 레닌은 유언장에 “스탈린의 무례함이 이미 용납될 수 없을 정도”라며 다른 사람을 서기장에 앉히라고 권고했다.
▽트로츠키=레닌의 모든 편지를 공개합시다. 내가 옳았다는 게 증명될 것이오.
▽스탈린=당신은 거짓말을 하고 있소. 진실을 두려워하는 불쌍한 겁쟁이이기 때문이지.
혁명과 내전 당시 적군(赤軍)을 이끌던 투사 트로츠키는 이미 스탈린 세력의 조롱 대상이었다.
▽얀 루즈타크=트로츠키 동지, 당신은 훌륭한 두뇌를 가졌지만 그게 바보의 몸 안에 놓여 있군요.
▽트로츠키=당신의 위트가 당신의 행정 능력보다 낫구려.
반대파의 회의 불참이 스탈린 세력의 조롱거리가 되기도 했다.
▽미하일 톰스키=어제 카메네프에게 왜 지노비예프가 안 나왔는지 물었소. 어디 아프냐고 물었더니 그의 아버지가 아프다더군.(웃음)
▽니콜라이 우글라노프=어떻게 그럴 수 있지?
▽톰스키=지노비예프에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소. 사랑스러운 아들로서 의무를 다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그런 중요한 문제를 제쳐 둘 수 있는지.
지노비예프가 레닌그라드 당 의장에서 쫓겨날 때 그의 측근 에브도키모프는 강력히 항의했다.
▽에브도키모프=동지들, 난 무척 화가 났소. 난 성미 급한 사람이오. 항상 자제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말이오.
▽스탈린=그러면 당신 건강이 위험할 거요.
스탈린의 냉정한 경고를 받은 에브도키모프는 1930년대 대숙청 때 총살당했다.
스탈린은 반대파를 제거한 뒤 한때 연합했던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톰스키까지 숙청했다. 대숙청 막바지인 1938년 스탈린은 자신의 냉혹한 평가를 기록에 그대로 남겨 뒀다.
“그들이 모두 스파이였을까? 물론 아니오. 그들은 약하고 준비가 안 됐던 거요. 이런 ‘실수’를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지만 나는 우리가 큰일을 해냈다고 말하고 싶소. 이 시기에 우리는 많은 사람을 잃었지만 새로운 간부들을 얻었소.”
그레고리 연구원은 “기록이 남겨진 15년 동안 정치국원을 지낸 22명 중 스탈린을 빼고 자연사한 사람은 4명에 불과했다”며 “정치국원은 그야말로 위험한 직업이었다”고 썼다.
이철희 기자 klimt@donga.com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