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벼락 앞 일렬로 세워놓고 기관총 위협”

  • 입력 2007년 9월 1일 03시 03분


코멘트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의해 인질로 잡혔다가 석방된 유경식(왼쪽), 서명화 씨가 31일 카불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유 씨는 “잡혀 있는 동안 12차례나 옮겨 다녔다”고 억류생활을 설명했다. 카불=사진 공동취재단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에 의해 인질로 잡혔다가 석방된 유경식(왼쪽), 서명화 씨가 31일 카불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유 씨는 “잡혀 있는 동안 12차례나 옮겨 다녔다”고 억류생활을 설명했다. 카불=사진 공동취재단
■ 인질들이 밝힌 피랍-억류 상황

탈레반에 43일간 억류됐다 석방된 한국인 피랍 일행 19명 중 유경식(55) 씨는 “6주 동안 12번을 옮겨 다녔다”고 억류생활에 대해 설명했다. 유 씨와 서명화(29·여) 씨는 31일 석방자 19명을 대표해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 시내 세레나호텔에서 국내 언론과 기자회견을 열고 납치 때부터 풀려나기까지의 상황을 상세히 밝혔다.

○“갑자기 무장 괴한들이 총 쏘며 차 세워”

▽서명화 씨=7월 19일 북부 마자리샤리프에서 카불을 거쳐 칸다하르로 향했다. (카불에서 칸다하르로 가는 길이) 밤엔 위험하지만 낮에는 안전하다고 해 샤리프에서 밤늦게 출발해 아침 일찍 카불에 도착했다. 한국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했다. 그때 버스운전사가 수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유경식 씨=그러면서 자기가 아는 운전사가 (대신 운전을 해) 믿을 만하다고 했다. 가즈니 주를 지날 때 운전사가 현지인 2명을 태웠다. 모르는 사람을 왜 태우느냐고 했더니 아는 사람이니 가면서 내려주면 된다고 말했다. 20∼30분 뒤 총소리가 났다. 중간에 탄 사람 중 앞에 앉은 사람이 총을 겨누며 정지하라고 했는데 운전사가 무시하니까 발포했다. 밖에서도 어디선가 나타난 탈레반이 차를 옆으로 빼라며 차바퀴에 (총) 한 방을 쐈다. 이어 무장한 2명이 차에 올라와 운전사를 구타하고 전부 내리라고 했다. 배형규 목사가 실신했다.

나와 제창희 씨를 오토바이 뒤에 태우고 10분 정도 질주했다. 어떤 마을에서 로켓추진총유탄(RPG)을 거치해 놓은 뚱뚱한 보스가 홍차를 마시라고 한 뒤 어디서 왔는지, 의사인지, 무슬림인지 등 많은 질문을 했다. 소련제 AK 소총으로 무장한 사람 10여 명이 우리를 회당 안으로 몰아넣었다. 거기서 컴퓨터와 카메라, 휴대전화 등을 회수하고 후에 돌려준다고 했다. 자기들은 정부의 사복경찰인데 “너희를 알 카에다로부터 보호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주로 농가에서 지내며 감자 두 쪽으로 식사도

▽유 씨=한때 감금된 곳이 반지하에 짐승 우리처럼 창문이 없고 환기통이 하나 있는 곳이었다. 인질범과 교환한다면서 야간에 오토바이 타고 (남자의 경우) 눈을 가리고 여자는 그냥 눈뜬 채로 3대에 태워 어느 집으로 갔다. 주로 달이 없을 때 이동했다. 오토바이는 헤드라이트도 끄고 불빛으로 전방에 신호를 하면서 이동했다.

아침에 보니 가축을 키우는 농가인데 할머니 1명이 앉아 있었다. 마을 아래로 탈출해 내려가 구조 요청을 하려 했지만 말이 안 통해서 어려웠다. 더욱이 갑자기 농부가 낫을 들고 쫓아오면서 소리를 질러 황급히 되돌아왔다.

나흘 밤을 자고 5일 만에 분산되기 시작했다. 처음에 11명이 나뉘고 12명은 그 다음에 6명으로 나뉘고 다시 3, 4명씩 나뉘었다. 이 사람들이 ‘남자는 죽인다’고 하는 걸 듣고 애가 많이 탔다. 마당에 한 사람 겨우 들어갈 토굴이 있었는데 4m 깊이에 그 끝엔 T자로 된 25m 정도의 규모였다. 집 밖에서 총격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서 씨=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다. 비스킷 먹으면서 먹을 수 있는 음식 좀 달라고 손짓발짓했다. 감자를 달라고 하니 2개를 줘서 절반으로 쪼개 4명이 먹었다. 단식한 사람은 없었고 초반에 잡혔을 때 빨리 구출해 달라고 금식기도를 했다. 사흘을 안 먹으니 그들이 보기엔 단식으로 보였을 수도 있었겠다.

○탈레반의 살해 위협

▽유 씨=맨 처음에 전체를 집합시켜 담벼락 앞에 일렬로 세우고 기관총으로 위협했다. 서너 명이 무기로 위협하고 한 사람이 비디오카메라로 찍었다. 패닉 상태였다. 그러더니 자기들이 알 카에다(탈레반)라고 신분을 드러내며 돌변했다. ‘너희들 잘못하면 (총 쏘는 시늉을 하며) 이렇게 한다’고 위협했다. (배 목사 살해는) 무작위로 데리고 나간 것이다. 본보기로 한 것 아닌가 생각한다. 또 고세훈 씨와 심성민 씨 중에서 고 씨를 뚫어지게 보다가 고개를 돌리더니 ‘너’ 하고 말한 뒤 (심 씨를) 무조건 끌고 나갔다.

○눈물 속의 석방 양보

▽유 씨=두 사람을 석방한다고 했는데 거기엔 김지나 김경자 이지영 씨 등 여자만 3명이 있었다. 그러면 남은 한 사람이 힘들지 않겠느냐고 그러니까, (김경자 씨가) 기가 막혀서 울고 그러니까, 이 씨가 자기는 회복됐다고 하면서 “나 대신 네가 가라”라고 얘기해서 김경자 씨가 갔다.

(흩어진 사람들 소식은) 석방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배 목사는 살해됐을 것으로 추측했다. 우리를 감금하는 집주인이 탈레반인데 낮엔 잠그고 농사일을 했으며 밤엔 소총으로 감시했다. 그 사람이 한국인 여자 2명이 아파서 돌아간다는 라디오 뉴스를 들었다. 중국에서 하는 영어방송으로 21명 중에 여자 2명이 석방됐고, 23명 중 2명은 살해됐다는 내용을 들었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젊은 여자들이 충격을 받을까봐 속으로만 알고 있었다.

○아프다고 한 통화 내용은 탈레반이 시킨 것

▽유 씨=‘너희가 아프다고 해야 구출해 준다’고 탈레반이 말을 시키고, 안하면 안 되게끔 시키는 것 같았다. 갑상샘 수술로 하루에 호르몬제 2알을 먹어야 하는데 납치되고 나서는 하루 1알로 줄였지만 1주일이 지나 떨어졌다. 손짓발짓으로 부탁했는데 여긴 아프간이지 한국이 아니라고 했다. 나중에 보니 한국에서 약을 3번이나 보냈다는데 결국 안 왔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카불=공동취재단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