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학위공장’ 러시아 학력위조 실태

  • 입력 2007년 8월 23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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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졸업장을 2000∼2만 루블에 팔아요.” 18일 오후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1km 떨어진 알렉산드롭스키사트 지하철역 안에서 한 러시아 남자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이렇게 말하며 졸업장 견본을 보여 줬다. 이 남자는 크렘린 주위를 지키는 경찰의 눈도 의식하지 않은 채 러시아 전국 대학교의 졸업장과 졸업증명서 학위인증서를 펼쳐 놓고 있었다. 일부 행인이 가격을 유심히 쳐다보며 관심을 보이자 이 남자는 “스키드카(할인)도 가능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검증 대비해 학교 학적부까지 바꿔치기

모스크바 시내에서 전철을 타면 ‘주문 하루 만에 졸업장 판매’라는 전단이 전동차 내부에 1주일 이상 붙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얀덱스 램블러 등 러시아의 유명한 포털 사이트에 들어가 ‘졸업장 구매’라는 단어를 치면 수백 개의 홈페이지와 연락처가 뜬다.

국립모스크바대 학생인 이고리 수하로프(22) 씨는 “학위 위조 사이트의 연락처가 바뀐 흔적은 있어도 홈페이지가 사라진 경우는 보지 못했다”며 “졸업장을 떳떳하게 사는 사람이 많다”고 말했다.

○ “현미경으로 봐도 식별 못해”

한 졸업장 위조 브로커는 21일 “(위조) 수수료는 대학 순위에 관계없이 위조 기술과 비용에 비례한다”고 귀띔했다.

러시아 지폐발행국(GOZNAK)이 사용하는 종이와 첨단 프린터를 사용하면 가격이 그만큼 올라간다는 얘기였다.

국립모스크바대의 한 강사는 “첨단 기술을 이용해 졸업장과 졸업증명서를 위조하면 현미경으로 봐도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브로커들에 따르면 첨단 기술로 위조한 졸업장의 가격은 1만2000∼3만 루블(약 45만∼113만 원). 러시아 졸업장과 졸업증명서 양식이 1996년 바뀌면서 졸업장 발행 시기를 이 이후의 시기에 맞추면 ‘기술적인 난이도’ 때문에 위조품의 가격이 올라간다.

모스크바 남부 프롭사유즈나야 거리에서 만난 한 브로커는 “러시아에서 졸업장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는 대학은 거의 없고 확인을 요청하는 곳도 드물기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고 장담했다.

이에 대해 국립모스크바대, 바우만공대, 그네신음대 등 유명 대학의 학위 관리 실무자들은 “다른 기관에서 공식 요청을 받으면 학적부를 보고 확인해 준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사들이나 교수들의 설명은 브로커들의 얘기와 비슷했다. 모스크바주립사범대 박사과정에 있는 한 시간강사는 “대부분의 대학이 사회주의 붕괴 이후 극심한 인력난을 겪고 있어 졸업장 위조 여부를 확인하는 시스템을 갖춘 대학은 거의 없다”고 설명했다.

졸업증명서 점검에 대비해 대학의 학적과 학점을 게재한 문서 진본을 위조하는 비즈니스까지 성행하고 있다.

졸업증명서 판매소를 운영하는 비탈리 씨는 “가장 어려운 위조가 국가안보 관련 군수산업체 입사 희망자들이 많이 찾는 교육부 등록용 박사학위”라며 “최소 비용이 1만 달러”라고 소개했다.

브로커가 해당 대학에 직접 찾아가 졸업생 명부를 위조해 끼워 넣어야 하기 때문에 비용과 시간이 훨씬 더 들지만 돈만 있으면 해결된다는 것이다.

○ 대학 데이터베이스로 ‘맞춤서비스’

인터넷에서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가짜 졸업장 판매 행위도 성행하고 있다.

한 학력 위조 전문 사이트는 홈페이지에 “학위를 먼저 받고 실무에 필요한 지식은 나중에 수강하는 것이 낭비를 줄이는 길”이라고 선전한다.

이 사이트는 러시아 모든 대학의 수강과목 시간표 등 데이터베이스를 완벽하게 갖췄기 때문에 ‘고객’의 요구를 100% 반영해 학적부와 졸업증명서를 보내준다고 했다.

사이트 운영자는 “모스크바에 거주하지 않을 경우 택배 서비스도 가능하며 한국은 물론 아시아권 국가의 고객들로부터 해외 주문도 접수하고 있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서울서 원격강의→러 방문 1, 2주 수업→학위 취득

“한국인 한 해 300여 명 모스크바서 학력 세탁”

한국에서 러시아 대학의 원격 수업을 받다가 러시아에 1, 2주 체류한 뒤 졸업장을 받는 한국인이 연간 3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22일 주러 한국대사관은 “지난해 6월부터 올 6월까지 원격 수업을 통해 졸업장을 받고 대사관에 공증을 요청한 한국인이 300명을 넘어섰다”고 밝혔다.

한국 대사관은 2005년부터 러시아에서 2년제 또는 4년제 대학 졸업장을 받은 한국인이 해당 기간만큼 체류한 사실이 입증되지 않으면 공증서를 발급하지 않기로 했다.

대사관 관계자는 “러시아어도 모르는 민원인이 러시아에서 받은 졸업장에 대해 대사관이 공증을 해줄 경우 한국에서 남용할 우려가 있어 이같이 방침을 정했다”고 말했다.

그는 “러시아에서 4년제 대학을 졸업했다고 주장하는 민원인들의 출입국 사실을 조회한 결과 러시아에 1, 2주 체류하고 졸업장을 받은 민원인이 95%가 넘었으며 공증 신청도 대부분 러시아에 거주하는 브로커가 대행했다”고 지적했다.

모스크바 시내에서 만난 한 졸업장 위조 브로커는 “대사관 공증신청은 한국인의 학력 분장(扮裝) 욕심을 반영한 것”이라고 전했다.

일각에서는 “한국인의 졸업장 공증 민원은 학위증 위조에 비해 양심적이며 불법행위가 아니다”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러시아 대학은 원격 수업과 통신교육을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사관 관계자들은 “공증 신청을 한 민원인의 상당수는 사실 한국의 어학원이나 음악 학원에 다니고 있으며, 현지 브로커를 동원해 졸업장을 받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말했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 통신교육을 받았다고 주장한 민원인들의 ‘학력 공식 인정’ 신청은 불법은 아니지만 편법에 해당된다는 것이 대사관 측의 설명이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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