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나눠주러 갔는데… 제발 잘 견뎌다오”

  • 동아일보
  • 입력 2007년 7월 30일 02시 58분



“무사 귀환을 기다린다”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한 여성의 여동생이 27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샘물교회 안에 있는 피랍자가족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며 무사 귀환을 기원하고 있다. 성남=사진공동취재단
“무사 귀환을 기다린다”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한 여성의 여동생이 27일 경기 성남시 분당구 샘물교회 안에 있는 피랍자가족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언니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며 무사 귀환을 기원하고 있다. 성남=사진공동취재단
“그 깊은 산 동굴 속에서 어찌 지낼까 생각에 엄마, 누나, 친지들은 오직 네가 우리 품에 환하게 웃으면서 돌아오길 기도한단다.”

아프가니스탄 피랍 사태 11일째인 29일 오후 피랍자 제창희(38·회사원) 씨의 어머니 이채복(69) 씨는 경기 성남시 분당구 피랍자가족대책위원회 사무실에서 하나뿐인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보고 싶은 창희야”로 시작되는 편지에는 1남 4녀 중 막내로 태어나 유난히 가족의 귀여움을 받던 창희 씨에 대한 어머니의 애절한 심정이 배어났다.

이 씨는 “어려서부터 누나들 사이에서 얼마나 사랑을 받고 살았니. 그 사랑을 여러 사람에게 전하려고 그 힘든 곳으로 갔는데 이런 기가 막힌 상황에 처하게 되다니…”라며 안타까운 마음을 나타냈다.

이어 “엄마와 가족을 생각하고 어려움을 견뎌 주길 바란다. 지혜롭게 행동하고 침착하게 이겨서 무사히 돌아오길 바란다”며 끝까지 희망을 잃지 말 것을 당부했다.

이 씨는 “사랑하는 창희야! 씩하고 웃는 얼굴이 무척이나 보고 싶구나.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길 우리 모두 기도하자”며 끝을 맺었다.

이날 피랍자가족대책위원회 사무실에 모인 피랍자 가족들은 오랜 기다림으로 극심한 피로를 호소하면서도 ‘최악의 상황’에 놓여 있을 피랍자들을 떠올리며 희망의 끈만은 놓지 않았다.

임현주 씨에 이어 두 번째로 육성이 공개된 유정화(39) 씨의 동생 정희(37) 씨는 “언니의 목소리를 듣고 무척 반가웠다”며 “언니가 살아 있어서 참 기쁘고 하루 빨리 공항에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정희 씨는 “언니를 비롯해 다른 분들의 건강이 걱정”이라며 “‘22명 전원 석방’이라는 보도만 기다릴 뿐”이라고 덧붙였다.

차성민 대책위원장은 “(가족들이) 많이 지쳐 있지만 정부 협상에 기대를 걸고 있다”며 “피랍자들의 석방을 바라는 가족들의 편지를 매일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한편 고(故) 배형규 목사의 형 신규(45) 씨는 “시신을 장기 보관하기 어렵다는 정부 측 설명에 따라 항공편이 마련되는 대로 배 목사의 시신을 한국으로 운구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신규 씨는 “(운구가 이뤄져도) 피랍자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모든 추모 행위를 연기하고 장례 절차도 피랍자들이 귀국하는 날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앞서 유족들은 전날 경기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에 마련됐던 배 목사의 빈소를 철수했다.

성남=이성호 기자 starsky@donga.com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교황 “한국인 인질 무사 귀환 호소”▼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9일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무장 세력에 납치된 한국인 인질들의 무사 귀환을 기원했다.

교황은 이날 이탈리아 로마 남부의 교황 휴양지인 카스텔간돌포에서 열린 주일 미사를 통해 “(납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행위”라며 “이런 범죄행위를 저지른 이들이 악행을 단념하고 인질들을 무사히 돌려보내도록 호소한다”고 말했다.
■ 탈레반, 유정화 씨 육성 공개


《9일간 여기에 있었습니다. 너무 두려워요. 때로 이들은 우리를 한 명씩 차례로 죽이겠다고 위협합니다. 매일 우리는 어디론가 이동하지만 어딘지 모르겠어요. 우리는 4명뿐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발 우리를 살려 주세요. 우리는 과일을 조금 먹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매일 위협받고 있어요. 그들은 비디오 ○○(분명치 않음)를 만들고 있어요. 그들은 모두 무장하고 있어요.

제발 유엔, 유네스코와 다른 모든 곳에 우리를 살려 달라고 해 주세요. 집에 가고 싶어요. 제발 전쟁이 없어야 해요. 제발, 제발….》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에 억류 중인 임현주 씨의 목소리가 공개된 지 이틀 만에 다른 인질인 유정화 씨의 육성이 28일 로이터통신을 통해 전해졌다. 협상이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자 새로운 인질을 내세워 더욱 압박하겠다는 전술로 보인다. 두 여성 인질의 육성 메시지는 상당 부분 탈레반의 강제에 의한 것으로 보여 탈레반 측 의도를 엿볼 수 있다.

▽1, 2차 육성 공개의 차이점과 새로 드러난 사실=탈레반이 두 번째 인질 육성 공개에서 외형적으로나마 강조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몸값’이 아니라 ‘탈레반 죄수 석방’인 듯하다.

임 씨는 “그들은 돈을 원해요”라고 강조했지만 영어로 진행된 유 씨의 발언에는 그런 대목이 없다. 유 씨는 구체적인 요구를 적시하지 않았지만 “제발 한국과 미국 정부에 전해 주세요”라는 말을 강조했다.

탈레반이 원하는 일부 죄수의 관할권이 미국에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말은 탈레반 수감자 석방을 간접 촉구하는 메시지로 풀이된다. 물론 돈을 요구한다는 외형적인 모양새를 희석하려는 의도일 가능성도 없지 않다.

또 탈레반이 다국적군의 군사작전을 극도로 우려한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유 씨는 “제발 전쟁이 없어야 해요”라는 말을 두 차례나 되뇌었다. 무니르 만갈 아프간 내무차관이 28일 로이터통신과의 인터뷰에서 “대화와 협상이 실패하면 다른 수단(other means)에 의지할 것”이라고 말한 것처럼 인질 석방을 위한 군사작전 추진을 탈레반이 두려워하는 듯하다.

유 씨가 속한 그룹이 여성 4명으로 이뤄졌고 매일 옮겨 다닌다는 것도 새로운 사실. 임 씨가 여성 모두와 함께 있다고 말했던 것에 비춰볼 때 탈레반이 첫 번째 육성 공개 이후 그룹을 세분해 인질을 계속 다른 곳으로 이동시켰을 가능성도 있다.

▽두 차례 육성 공개에서 확인된 공통점=인질에 대한 협박의 강도가 좀 더 세지긴 했지만 절박한 인질의 심정과 상황만큼은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임 씨가 “여러분이 도와주셔서 나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한 것처럼 유 씨도 “집에 돌아가고 싶다”는 희망을 거듭 밝혔다.

그는 비교적 차분한 목소리를 유지하면서도 “제발 살려 주세요”라는 말을 수차례 되풀이했다. 무장한 주위 탈레반 감시원들의 협박 속에서 당장 내일의 운명을 알지 못하는 인질들로서는 하루하루가 극도의 공포 그 자체임을 드러낸 것이다. 인질의 대부분이 납치된 지 열흘을 넘기면서 건강 상태가 악화되고 있다는 것도 또다시 확인됐다. 임 씨가 “모두 아프다”고 말한 뒤 탈레반 측은 한 명만 아프다고 이를 부인했다. 그러나 유 씨의 설명을 통해 인질 모두가 아프다는 사실이 재확인됐다.

인질 규모에 차이가 생기긴 했지만 다른 그룹의 소식을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여전하다. 오히려 인질 규모가 세분화됨으로써 서로 고립 상태가 심해졌고 그만큼 공포감도 커진 듯하다.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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