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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2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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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장 노조위원장 알렉세이 에트마노프는 러시아 공산당 완장을 차고 “단체협약이 체결되지 않으면 14일 총파업에 들어가겠다”고 외치고 있다. 그 앞에서는 브세볼로즈스크 지역 사회단체 대표들이 ‘노동자 계급, 노동자 직업동맹, 노동자 정당은 승리할 것이다’라고 쓰인 피켓을 들고 박수를 친다.
공산당 지역조직과 직업연맹이 가세한 시위가 계속되자 사용자 측은 임금 인상을 제시하며 양보 의사를 보였다. 그렇지만 일시 해고자에 대한 일자리 보장 등 근로자들의 요구는 갈수록 눈 덩이처럼 부풀고 있다.
러시아 정부 관리들은 노동자들의 총파업으로 촉발된 2월 혁명 90주년 기념일(23일)을 앞두고 이 시위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모습이 역력하다. 세르게이 바실리비치 국제노동문제연구소 연구원은 “2월의 파업은 역사가 반복될 것이라는 공포를 유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 50여만 명의 총파업으로 시작된 러시아 2월 혁명은 병사들의 합세로 제정러시아를 마비시켰다.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같은 해 3월 2일 자진 퇴위했다. 이 혁명으로 세워진 러시아 최초의 입헌 민주주의 정부는 사회주의 세력과의 연합정부, 부유세 도입, 부동산 규제 등 다양한 실험을 했지만 같은 해 10월 볼셰비키에 권력을 넘겨줬다. 당시 ‘4월 테제’로 사회주의 세력을 움직인 레닌은 2월 혁명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불렀다.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본주의를 도입한 러시아 정부와 고위 인사들은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줄곧 ‘과거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1998년에는 2월 혁명으로 물러났다가 소련 내전 당시 총살당한 니콜라이 2세의 유해를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다시 묻었다.
올해 1월에는 시베리아에서 볼셰비키 적군과 싸우다 숨진 블라디미르 카펠 장군 유해와 유물을 되찾아 모스크바 돈스코이 수도원에 안치했다. 당시 장례식에 참석했던 알렉산드르 토르신 연방회의(상원) 부대변인은 “러시아의 과거는 지금도 잊을 수 없다”며 애도를 표했다.
‘미스터 동무’ 정권으로 불린 사회주의에 90년간 길들여 있던 일부 러시아 역사학자도 2월 혁명의 성격과 레닌의 역할을 다시 평가하고 있다. 역사비평가 표트르 로마노프 씨는 국영 통신사 리아노보스티에 낸 기고문에서 “2월 혁명은 맹목적인 반(反)군주 혁명으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다”며 마르크스주의의 해석에 반기를 들었다. 그는 “2월 혁명 당시 ‘빵’과 ‘땅’ 문제를 해결할 부르주아의 기반은 너무 빈약했으며 레닌도 이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에서 현실을 외면하고 제네바에서 하품하며 지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러시아 국민은 2월 혁명에 대해 복잡한 심경을 드러내고 있다. 모스크바대 러시아어학 강사 타치야나 이바노브나(63·여) 씨는 “러시아가 모처럼 맞은 민주주의의 기회를 놓쳤다”고 한탄했다. 연금생활자 이고리 미하일로비치(65) 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자본주의 원리가 없어져야 편안한 세상이 온다”고 말했다.
2월 혁명이 미완의 정치 실험으로 끝났지만 모스크바 시내에서는 지도자의 공백에 대한 두려움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모스크바 시민 10명을 만나 내년 3월에 나올 대선 후보자에 대해 질문을 하면 8명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후임자를 지금 생각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인다. 이들은 2월 혁명에서 10월 혁명으로 이어진 극심한 사회 혼란과 민주주의에 대한 희망을 동시에 떠올리고 있었다. 복고의 움직임과 불안한 미래가 교차하며 러시아를 어디로 몰아갈지 주목된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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