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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7년 2월 2일 19시 5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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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쩌둥(毛澤東)의 그늘에 가려 만년 2인자였으면서도 끝까지 마오를 지지해 '마오의 평생 동지'로 알려진 저우언라이(周恩來). 그러나 그는 1976년 1월 임종 직전 마오를 중국의 지도자로 추대한 것을 크게 후회한 것으로 뒤늦게 드러났다. 이 같은 사실은 저우의 아내 덩잉차오(鄧潁超)가 저우를 간호하면서 그의 말을 하나하나 기록한 병상일기가 최근 공개되면서 밝혀졌다.
마오는 이런 저우의 속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저우가 1년 가까이 병상에 있는 동안 오랜 혁명동지들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끝내 문병 한번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사망한 뒤에도 덩샤오핑(鄧小平)에게 추도사를 맡기고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꼴찌를 한 마오를 주석으로 밀었다. 그런데…."=저우는 임종을 앞두고 마오를 중국의 지도자로 추대한 사실을 크게 후회했다.
"1944년 5월 21일 중국 공산당 6기 7중전회 1차 회의에서 주더(朱德), 류사오치(劉少奇), 런비스(任弼時), 그리고 내가 주석단을 구성(마오도 주석단이었으나 말하는 과정에서 빠진 듯)해 최다 득표자를 주석으로 하기로 했다. (투표 결과) 류가 1위, 주가 2위였고 마오는 4위였다. 하지만 나는 내부회의에서 주석은 마오가 맡도록 하자고 건의했다. 주는 크게 반발했다. 나는 또 한 차례, 내 의지와는 다른 정치적 과오를 범한 것이다.(1975년 11월 17일)"
그는 또 1962년 1월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소집한 확대공작회의(일명 7000인 회의)에서 마오를 퇴진시키지 못한 것이 문화대혁명이라는 대재앙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 듯하다. 임종 1, 2개월을 앞둔 저우의 후회는 통한으로 이어졌다.
"1956년 9월 29일 중국 공산당 8기 전체회의 후 1차 정치국 회의에서 2가지 결의가 통과됐다. 당의 주석은 한 차례만 연임하고 지도자의 권력을 제한하며 지도자에 대한 감시를 강화하고 당내 민주집중제를 실현한다는 것이었다. 17명의 정치국 위원 중 15명이 찬성했고 마오와 린바오(林彪)만 기권했다. 그러나 결의는 개인의지(누구의 의지인지를 밝히지 않음)에 의해 모두 폐지됐다. 우리는 모두 죄과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1975년 11월 22일)"
▽마오의 노선에 깊은 회의=저우는 투쟁으로 일관하는 마오의 노선에도 깊은 회의를 느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숨지기 한 달 전부터 이런 자신의 견해를 아내에게 털어놓았다.
"한 차례의 정치 폭풍우가 다가오려 한다. 아직도 투쟁이 필요한가? 공산당 철학은 투쟁철학이라는 것인가?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도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한가?(1975년 12월 3일)"
저우는 경제건설을 중시하고 4대 현대화 노선을 부르짖었지만 마오는 계급투쟁을 주장하며 그의 노선을 '생산력만을 중시하는 우파노선'이라고 비판했다.
▽공개까지 30년=병상일기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는 30년이 걸렸다.
저우가 숨진 뒤 1976년 10월 덩은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에 일기의 처리 방법을 물었으나 중앙정치국은 '보관해 두라'고만 답변했다. 1978년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3년이 지난 1981년 7월 덩은 다시 중앙정치국에 문의했으나 여전히 '미공개 보관'이라는 지침이 돌아왔다.
결국 덩은 1992년 7월 세상을 떴고 병상일기는 중국 공산당 중앙정치국 산하기관으로 넘어갔다. 2004년 3월 중국 공산당은 이 일기를 제한된 범위에서 당사(黨史)에만 반영한 뒤 다시 덮어두었다.
이처럼 쉬쉬해오던 병상일기가 공개된 것은 지난해 1월 8일 저우 서거 30주년을 맞아 중앙당교와 중앙당사연구실 등이 공동으로 '저우언라이사상연구토론회'를 열면서부터. 여전히 일반에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지난해 5월 홍콩 시사월간지 '정밍(爭鳴)'이 '문화대혁명 40주년 기념' 특집을 게재하면서 이 일기를 입수해 일부를 실었다.
하지만 대륙 언론은 여전히 침묵했다. 9개월이 흐른 지난달 31일 '반전반자(伴眞伴假)'이라는 ID를 가진 누리꾼이 중국의 인터넷 토론방 '무원차이징(牧文財經)'에 올리면서 결국 알려지게 됐다.
베이징=하종대특파원 orionh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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