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의 힘에 기대 집권… 美의 힘앞에 스러지다

  • 입력 2007년 1월 1일 03시 00분


코멘트
지난해 12월 30일 처형된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은 국내외에서 극명하게 엇갈리는 평가를 받아 왔다.

한편에서 그는 ‘전쟁광’으로 증오의 표적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선 ‘아랍의 긍지를 살린 혁명가’로 추앙받았다. 아랍 전체의 지도자를 꿈꾸며 극단적인 조치를 서슴지 않았던 그는 24년에 걸친 철권통치를 뒤로하고 교수형으로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다.

○ 가난한 시골 청년서 중동 패권 야심가로

후세인은 수니파 하층계급 출신으로 1937년 바그다드 북쪽 티크리트의 시골마을 오우자에서 태어났다. 생후 8개월 만에 고아가 된 그는 1956년 중학생 신분으로 사회주의와 범아랍민족주의를 주창하는 바트당에 입당하며 정치 세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정치가 폭력의 게임이었던 이라크에서 음모와 폭력을 서슴지 않는 대담한 처신으로 그는 승승장구했다. 30대 젊은 나이에 바트당 민병대 조직을 맡으며 단번에 당의 핵심으로 떠올랐다.

1959년 총리 암살 기도에 연루돼 이집트로 도피한 그는 1963년 이라크로 돌아와 투옥됐다. 옥중에서 바트당 부총재로 선출된 뒤 1967년 탈옥해 쿠데타를 주도했다. 쿠데타 성공 뒤 그의 사촌인 아메드 하산 알바크르가 이라크 지도자로 선출되면서 후세인은 혁명지휘위원회(RCC) 부의장에 올랐다.

그는 1960년대 말∼1970년대 초 권력의 2인자로 활동하면서 여러 진보적인 정책을 내놓았다. 의료시설과 전기, 상하수도 시설을 개선하고 문맹퇴치 프로그램을 추진해 민심을 얻었다.

1979년 알바크르가 질병으로 하야하자 후세인은 대통령에 취임했다. 즉시 그는 주변 국가로 눈을 돌려 아랍 패권을 노리는 지도자로 부상하겠다는 야심을 불태웠다.

1980년 그는 자신의 체제에 반대하는 시아파를 지원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란과 전쟁을 시작했다. 독가스와 신경가스를 살포하라는 명령도 서슴지 않았다. 이라크 북부에서 반항하던 쿠르드족에는 초토화 작전을 감행했다.

반대자에 대한 그의 탄압은 특히 잔혹하기로 이름 높았다. 1982년 각료회의 중 리야드 이브라힘 후세인 보건장관이 ‘이란과의 평화협상을 위해 대통령이 잠시 하야하는 것이 어떤가’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후세인은 다른 방에서 제안을 논의하자고 말했지만 그들이 방을 나간 뒤 곧바로 총성이 울렸다. 후세인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와 회의를 속개했다.

○ 미국의 ‘친구’에서 ‘적’으로

후세인의 이란 공격에는 미국이 든든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미국은 이란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해 이라크에 각종 군사정보를 제공했다.

미국과의 우호 관계는 1991년 걸프전쟁으로 막을 내렸다. 후세인은 1990년 8월 석유값의 안정을 파괴한다는 이유로 쿠웨이트를 침공해 점령했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미국이 주도한 ‘사막의 폭풍’을 맞고 무너졌다.

그의 종말이 임박한 듯했지만 미군은 물러갔고 유엔의 강도 높은 경제 제재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강력한 권력을 유지했다. 2003년 3월 미국은 후세인 정권이 테러 조직을 비호했고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며 이라크를 침공했다. 후세인은 12월 고향인 티크리트의 땅굴에서 긴 수염과 장발을 한 초췌한 모습으로 체포됐다.

○ 두자일 학살사건으로 사형 선고받다

2004년 미군에서 이라크 임시정부로 인계된 후세인은 이라크 특별재판부에 의해 두자일 마을 학살사건 주도 혐의로 2005년 기소됐다. 이 사건은 그를 교수형으로 이끈 죄목이 됐다.

두자일 사건은 1982년 7월 바그다드 북쪽 64km 지점에 있는 시아파 마을 두자일을 지나던 후세인 차량 행렬에 젊은이 몇 명이 기습 암살공격을 감행한 것이 계기가 됐다.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집권 3년째였던 후세인은 이 사건을 정치적 안정의 도구로 활용했다. 그는 사건을 시아파 정치세력의 음모로 단정하고 범인 색출에 나서 마을 주민 148명을 암살음모 연루 혐의로 학살했다.

마을 여성과 어린이들까지 사막에 있는 수용소로 보내 고문을 자행했고 상당수가 실종됐다. 마을은 방화로 초토화됐다.

지난해 10월 시작된 재판에서 후세인은 두자일 사건 혐의의 무죄를 주장했지만 주민 사형명령 문서의 서명자가 후세인이라는 증거가 나옴으로써 항변은 무위로 돌아갔다.

○ 고향 티크리트에 잠들다

사형 집행 직후 티크리트 살라후딘 주 주지사와 후세인의 출신 부족인 알부 나시르족 대표가 바그다드로 가서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은 사형이 집행된 지 채 24시간이 지나지 않은 31일 새벽 티크리트 근교의 고향마을인 오우자에 매장됐다.

시신이 옮겨오기 전 티크리트에서는 수백 명의 주민이 모여 후세인 추모 시위를 벌였으나 오우자 중심부의 공회당에서 열린 장례식은 비교적 조용하게 진행됐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이라크 당국은 시위 격화를 우려해 티크리트에 4일간 통행금지를 실시하고 외부인 출입을 금지시켰다.

오우자에 사는 후세인의 친척 무자 파라지 씨는 “후세인이 2003년 이라크전쟁 중 사망한 아들 우다이와 쿠사이의 묘 옆에 묻혔다”고 전했다.

정미경 기자 mickey@donga.com

김영식 기자 spear@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