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수교 1965~2005]‘歷史’에 발목잡힌 愛憎의 40년

  • 입력 2005년 6월 22일 03시 05분


《22일은 한국과 일본이 과거의 굴곡진 역사를 매듭짓고 한일 기본조약을 체결, 국교를 정상화한 지 40주년이 되는 날이다. 강산이 4번 바뀔 세월이 흘렀지만 두 나라는 여전히 ‘멀고도 가까운 나라’이고 한일 관계는 여전히 애증(愛憎)으로 점철돼 있다.》

▽험난했던 국교정상화=한일회담은 1951년 미국이 동아시아 정책의 일환으로 한일 양국에 수교를 종용해 시작됐다. 그러나 좀처럼 진척을 보지 못하다가 1961년 경제개발자금 확보의 필요성을 느낀 박정희(朴正熙) 정부의 결정과 미국의 적극적인 중재로 한일회담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한일회담의 최대 걸림돌은 ‘돈’이었다. 돈의 성격을 놓고 한국은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 성격의 ‘청구권 자금’을 원했고, 일본은 ‘경제협력자금’을 고집했다. 1962년 김종필(金鍾泌)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일본 외상은 극비리에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상업차관 1억 달러 이상’에 합의했다. 유명한 ‘김-오히라’ 메모이다.

정부는 이를 토대로 한일 국교정상화를 추진했지만 국민의 반발이 거셌다. 1964년 6월 3일 1만여 명이 거리 투쟁에 나섰다.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1000여 명을 체포, 300여 명을 구속했다. 이른바 6·3사태다.

일본에서도 협정에 대한 반대가 심했다. 한일 양국은 진통 끝에 1965년 6월 22일 국교를 정상화하고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게 됐다.

▽굴곡의 40년=국교정상화 이후에도 양국 관계는 순탄치 못했다. 일본 총리의 공식 방한이 1983년, 한국 대통령의 공식 방일이 1984년에 처음 이뤄질 정도로 감정의 골은 깊고 넓었다.

박 대통령은 집권 18년 동안 단 한 차례도 일본을 찾지 않았다. 일왕의 방한은 수차례 추진됐으나 아직 실현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다.

양국의 정기 각료회의가 개최되고 한일(일한)의원연맹이 창립되는 등 관계를 다져 가던 양국은 1973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위기를 맞았다. 수세에 몰린 한국 정부는 1974년 8월 15일 재일교포 문세광의 ‘박정희 저격 미수사건’을 계기로 대일 공세를 취했다. 대일 단교(斷交) 주장이 거세지면서 양국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

이후 양국은 대륙붕 공동개발 협정을 발효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교류의 폭을 넓혀 갔으나 번번이 ‘역사 문제’에서 발목이 잡혔다. 1982년 역사왜곡 교과서 파동으로 한일 관계가 급랭한 이래 역사 갈등은 주기적으로 반복됐다. 일본 정치지도자들의 ‘과거사 망언’도 끊임없이 되풀이됐다.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村山富市) 일본 총리는 “일본은 식민 지배와 침략으로 아시아 제국에 다대한 손해와 고통을 주었다”며 반성했다. 1998년에는 한일 정상이 ‘21세기 새로운 한일 파트너십 공동선언’을 발표하는 등 관계 개선 노력은 계속됐다.

한국은 1998년 일본 대중문화의 단계적 개방을 발표했다.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는 양국 간 이해의 폭을 넓히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는 평을 듣고 있다.

그러나 한일 우정의 해인 올해 초 불거진 독도 및 역사왜곡 교과서 파문으로 양국 관계는 험악한 상황을 맞게 됐다.

윤종구 기자 jkm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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