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연구가 퀴블러박사 타계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간다”

  • 입력 2004년 8월 26일 18시 5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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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미국 콜로라도대 의대의 한 강의실.

작은 체구에 수줍은 표정의 대학원 조교 엘리자베스 퀴블러는 백혈병으로 죽어가는 16세 소녀 환자와 함께 들어섰다. 그리고 학생들을 향해 말했다. “누구든 이 환자를 인터뷰해 보라”고.

머뭇거리던 몇몇 학생이 혈구 수 측정치 등 의례적인 질문을 던지자 소녀는 못 참겠다는 듯 자문자답을 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졸업파티에 가지 못하는 것, 데이트할 꿈조차 꿀 수 없다는 것,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다는 것이 어떤 기분일까요?”

“왜 사람들은 (내가 죽어간다는) 진실을 말해주지 않는 거죠?”

죽음을 앞둔 소녀의 독백에 강의실은 눈물범벅이 되었다.

퀴블러 박사는 학생들을 향해 외쳤다.

“이제야 과학자가 아닌 인간으로 되돌아왔군요!”

수세기 동안 의학계에서 금기시됐던 ‘죽음’에 대한 연구와 불치병 환자에 대한 처우 개선 등을 요구했던 정신과 전문의 퀴블러 박사.

그가 24일 78세로 세상을 떠나자 뉴욕 타임스는 25일 퀴블러 박사의 일화를 소개하는 장문의 추모 기사를 게재했다.

스위스 출신으로 취리히대 의대 졸업(1957년) 후 미국인 의사 남편을 따라 뉴욕으로 이주해 인턴생활을 시작한 그는 비참한 모습을 목도했다.

살 가망이 없다고 생각되는 환자들은 옷이 벗겨진 채 침대나 욕조에 방치됐고 어린 불치병 환자들은 “약을 먹으면 나아질 것”이라는 의료진의 판에 박힌 이야기만 들어야 했다.

이 같은 현실에 돌을 던진 것이 1968년 그가 출간, 이후 25개 언어로 번역된 저서 ‘죽음의 순간(On Death, And Dying)’.

당시 시카고대 의대 교수였던 그는 이 책을 통해 불치병 환자들이 안락한 죽음을 맞을 수 있는 정신 치료 및 연구 필요성을 역설했다. 말기 환자들을 위한 미국 내 호스피스 시스템 창출의 배경에도 그의 힘이 작용했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불치병 환자들이 거치는 정신적 과정을 다섯 단계(부정, 분노, 타협, 우울, 수용)로 분석했다. 죽음에 관한 저서만도 200권이 넘는다.

퀴블러 박사의 이 같은 노력으로 1980년대 들어서는 불치병 환자에 대한 연구 치료가 전 세계 의학 교육계의 필수 영역으로 자리매김했다.

‘죽음에 대한 전문가’인 그에게도 죽음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1995년 심장발작을 일으킨 뒤 전신마비로 고통 받아 온 퀴블러 박사는 24일 애리조나주 스콧데일의 자택에서 자신의 임종을 예감했다. 그러나 평소 “죽음은 휴가를 떠나는 것과 같다”며 여유를 부리던 모습은 그대로였다.

“나는 은하수로 춤추러 간다.” 그가 마지막 남긴 유언이었다.

김정안기자 cred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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