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 스캔들에 고이즈미 총리 휘청

일본 정계를 강타한 연금 스캔들이 거물급 정치인들의 '사퇴 도미노'로 번지면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가 집권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제1야당인 민주당 대표로 내정됐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대표 대행이 자신의 국민연금 미가입 사실을 공개하고 당수직을 포기하자 국민들의 시선이 똑같은 실수를 한 고이즈미 총리에게로 쏠리고 있는 것.

집권 자민당의 대북한 강경론자들은 고이즈미 총리가 22일 방북에서 연금 문제를 희석할만한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 북한측에 지나친 양보를 하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한다.

▽야당의 '물귀신 작전' = "총리와 마찬가지로 나도 연금에 미가입한 적이 있다."

오자와 대행은 당수직 포기 의사를 밝힌 17일 밤 기자회견에서 "고이즈미 총리와 같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여러차례 강조했다. 고이즈미 총리와의 동반 퇴진을 겨냥한 '물귀신 작전'이라는게 일본 언론의 해석.

오자와 대행은 국회의원의 국민연금 가입이 의무화되기 이전인 1980년 4월부터 86년 3월까지 6년간 연금에 가입하지 않았다. 이는 고이즈미 총리의 미가입 기간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일본 국회의원의 연금 가입은 86년 4월부터 의무화됐으며 그전까지는 개인의 선택에 따른 임의가입이었다. 연금과 관련해 물의를 빚은 정치인들은 의무가입 기간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보험료를 체납했다는 점에서 고이즈미 총리나 오자와 대행과는 '죄질'이 다르다.

호소다 히로유키(細田博之) 관방장관은 이런 점을 들어 "오자와 대행이 갑자기 왜 사퇴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며 파문 확산을 경계했다. 자민당 일각에선 '자폭 테러'라는 비아냥도 나왔다.

하지만 오자와 대행은 "법적 책임은 없을지 몰라도 사회보장제도 확립을 추진해야 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정치적 책임까지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며 고이즈미 총리를 계속 압박했다.

▽북일정상회담이 변수 = 아직 일본 여론은 '총리가 사퇴할 정도는 아니다'는 쪽이 우세하다. 15∼16일 실시된 아사히신문의 여론조사에서는 고이즈미 총리의 해명에 대해 '납득되지 않는다'(52%)가 절반을 넘었지만 정작 '총리가 물러나야 한다'는 응답은 20%에 그쳤다.

집권 자민당은 일련의 연금 스캔들에 대해 "마녀사냥식으로 흐르고 있다"며 조기 수습에 총력을 쏟고 있다. 언론의 논조가 정치인 개개인의 연금납부 기록에 매달리는 행태를 개탄하는 방향으로 바뀌는 것도 고이즈미 총리에게 유리한 요인.

연금 스캔들은 북일정상회담이라는 대형 이슈에 밀려 한차례 잠복했다가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 방문을 마친 뒤 다시 정치 쟁점으로 떠오를 가능성이 크다는게 중론. 일본 언론은 고이즈미 총리가 피납자 잔류가족의 귀국을 성사시켜 실각 위기에서 벗어나려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