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홍찬식칼럼]베네치아의 지혜

  • 입력 2004년 2월 6일 18시 1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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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진정으로 동북아 경제중심이 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눈여겨보아야 할 나라가 있다. 지금은 관광지로만 남아 있는 베네치아공화국이다. ‘물의 도시’ 베네치아는 누구나 꼭 한번 방문하고 싶은 명소이지만 실제 방문해 보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었기에 이런 ‘도시의 걸작품’을 남겨 놓았는지 더욱 호기심을 품게 된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베네치아의 번영을 이렇게 평가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재미삼아 섬으로 옮겨온 것이 아니었다. 고난(이민족의 침공)이 가져다준 교훈에 따라 가장 불리한 지역(개펄)에서 안전지대를 찾은 것이다. 그들은 현명하게 대처했고 그들이 번창하고 부유하게 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1400년에 걸쳐 지속됐던 베네치아공화국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장수(長壽)국가였고 유럽 최고의 경제대국으로 영화를 누렸다. 베네치아인들이 ‘현명하게’ 대처했다면 그 요체는 무엇이었을까.

▼비슷한 두 나라 ▼

시대는 달라도 한국과 베네치아는 많은 공통점을 지녔다. 베네치아는 소금과 해산물 말고는 가진 게 없는 나라였다. 베네치아가 교역으로 먹고살아야 할 운명을 갖고 태어난 것은 한국이 수출로 경제를 지탱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같다. 베네치아가 강대국 틈새에서 항상 초긴장 상태로 국익을 저울질하며 살아야 했던 처지도 우리와 비슷하다.

베네치아는 ‘상인의 나라’였지만 동시에 ‘기술자의 나라’였음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도 그럴 것이 베네치아에서 기술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었다. 민물과 바닷물이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베네치아는 주변의 물이 썩지 않도록 유지하는 게 급선무였다. 연약한 지반이 침하되지 않게 대비해야 했다. 물이 오염되면 치명적인 전염병이 창궐할 게 뻔했고 땅이 가라앉으면 더욱 끝장이었다. 빠르고 견고한 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면 해상무역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래서 기술과 기술자는 상인보다 중시됐다. 한국이 수출에 앞서 끊임없이 기술개발을 하지 않으면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과 흡사하다.

베네치아의 외교는 ‘예술’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이해당사국 사이를 오가며 교묘히 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정치에서는 대중에 영합하는 지도자를 철저히 경계하는 반(反)영웅주의가 핵심이었다. 대중의 인기를 척도로 정치인을 뽑게 되면 국익보다는 인기 유지를 위해 일하게 되고 자원이 없는 나라로서는 결딴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10인위원회라는 소수의 최고결정기구를 만들어 정치와 외교를 맡기되 위원들을 1년에 한 번씩 교체해 독단으로 흐르는 것을 막았다.

이 같은 ‘성공비결’의 밑바닥에는 자유로움과 유연성, 포용력이라는 탁월한 덕목이 있었다. 이를 좇아 유럽 각국에서 지식인들이 모여들었고 베네치아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문화의 중심으로 우뚝 설 수 있었다. 결국 실용주의와 현실주의가 ‘가난한 피란민’ 베네치아를 부자로 만든 것이다. 이런 가치는 오늘날 선진국의 국정운영 방향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에게도 절실한 것이 국부(國富)임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나라가 부강해야 분배와 복지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내세우는 국민소득 2만달러나 동북아 경제중심도 그런 전제 아래 내건 목표일 것이다.

▼거꾸로 가는 한국 ▼

하지만 우리의 현실은 베네치아의 성공비결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다. 개혁과 진보의 요체는 자유로움과 유연성일 터인데 개혁을 표방한 정부부터 대립과 갈등을 일삼으니 이 땅에서 자유로움과 포용력을 논하는 게 무리다. 베네치아 정치가 얼음처럼 차가운 이성과 침착성을 지녔다면 우리는 대중주의의 달콤함과 편리함에 빠져 있다. 없는 집 제사 돌아오듯이 반복되는 선거 때마다 국가 전체가 매달림으로써 허공으로 날리는 국부의 양은 또 얼마나 많은가.

외교에서는 국익 우선이라는 원칙이 흔들리고 기술자 푸대접은 인재의 양성과 적재적소 배분이라는 부국의 원리에 역행하고 있다. 경제중심 국가의 모델로서 베네치아의 지혜로움을 배워야 한다.

홍찬식 논설위원 chansi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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