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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12월 25일 18시 1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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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최초의 유럽 단일통화인 유로화가 통용될 내년 1월1일을 앞두고 ‘유로랜드(유로화 도입 12개국)’에 불안과 설렘이 교차하고 있다. 프랑스 파리에 사는 한 중산층 부부의 일상을 통해 유로화 도입을 코앞에 둔 유럽인의 삶을 들여다봤다.》
주말인 22일 오후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기 위해 파리16구의 한 쇼핑센터에 갔던 프랑수아 랑베르(40)는 계산대 앞에서 30분이나 기다려야 했다. 계산대의 점원은 불평을 터뜨리는 손님들에게 “신용카드의 승인이 잘 안 떨어진다”며 쩔쩔 맸다.
줄지어 선 손님들은 “유로화 도입 때문 인 것 같다”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월요일인 24일 르몽드지를 펼쳐본 랑베르씨는 주말에 신용카드 전산망에 과부하가 걸려 전국에서 비슷한 소동이 있었음을 알게 됐다.
‘유로화 통용이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유로랜드 각국 정부의 홍보는 아직 랑베르씨 부부같은 유럽 일반인들의 불안감을 떨어내지 못하는 것 같다.
랑베르씨의 부인 마리(37)는 얼마전 대형 슈퍼 체인점인 모노프리(Monoprix)에서 쇼핑한뒤 0.25㎏에 25.58프랑(약 4480원)하는 냉동연어 가격이 4배인 102.32프랑으로 계산된 것을 발견했다. 바코드를 읽는 기계가 프랑화로 표시된 물건 값 대신 유로화로 표시된 ㎏당 가격을 읽은 것.
상점 측은 “바코드를 읽는 기계들이 이미 유로화만 읽도록 조작돼 있었기 때문”이라며 사과했다. 마리씨는 싸다 싶은 물건을 들었다가 가격이 유로화(1유로〓6.55957프랑, 1153원 정도)로 표시돼 있는 것을 보고 내려놓은 게 한 두 번이 아니다.
유로화 도입을 앞둔 랑베르씨 부부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집세다. 파리의 중산층 거주지인 15구에 사는 랑베르씨 가족은 방 2개에 거실 하나인 아파트를 월 8500프랑(약 150만원)에 세들어 살고 있다.
그런데 집 주인이 최근 ‘내년부터 월 1500유로(약 170만원)는 받아야겠다’고 통보해온 것. 은행의 중견간부인 랑베르씨가 월 2만3000프랑(약 400만원), 약사인 부인 마리씨가 1만5000프랑(약 260만원)의 월급을 받아 부부 월수입이 3만8000프랑이지만 집세로만 1만프랑 가량이 나가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 이 때문에 이들 부부는 좀 더 월세가 싼 파리 근교로 이사가든지 아니면 30년 상환 조건으로 조그만 아파트를 이 기회에 장만할 지를 고민 중이다.
물론 유로화 도입에 따른 가격 인상이 랑베르씨 부부에게 새로운 일은 아니다. 현행 서비스 요금이나 물건 값을 유로화로 환산할 경우 잔돈 계산이 복잡해지고 현금계산기 및 자판기 교체 등 유로화 전환에 따라 추가 비용이 발생한다는 이유로 기업이나 상인들이 슬그머니 가격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다니는 파리 교외 골프연습장 측으로부터도 3000프랑(약 52만원)의 연회비가 내년부터 500유로(약 57만원)로 오른다는 얘기를 들었다. 랑베르씨는 다른 나라 국민도 가격 인상으로 비슷한 고충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이들 부부가 퇴근 이후 함께 자주 커피를 마시는 집 앞 카페는 12프랑 하던 에스프레소 한잔을 1월1일부터 2유로(13.12프랑)에 팔겠다고 한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 피에르(10)는 21일 학교에서 나눠 준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유로화 동전 모양의 초콜릿을 받아왔다. 파리 시내 곳곳에는 ‘유로는 우리의 돈’이라는 구호와 함께 유로 화폐단위 표시의 네온사인이 켜졌지만 이들 부부에게 유로화는 아직도 생소한 돈이다.
더구나 아르헨티나의 외채 상환 중단 선언 이후 ‘천문학적인 아르헨티나 외채의 20%가 내년부터 함께 유로화를 쓰게 될 스페인이 꿔준 돈’이라는 얘기가 파리의 일반인들 사이에 퍼지면서 랑베르씨 부부의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파리〓박제균특파원>pha가@donga.com
▼"검은 돈 써버리자" 유럽 과소비 열풍▼
유로화 전면 통용을 앞두고 독일에서는 이상 소비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쇼핑에 나선 소비자들이 고액권의 마르크화를 뿌리고 있는 것.
여러 차례 큰 전쟁을 겪으면서 집안에 현금을 쌓아두는 습관에 젖어 있는 독일인들이 유로화 도입을 앞두고 마르크화를 써버리려 한다는 게 독일 통화당국의 설명. 독일 정부는 3만마르크(약 1800만원)까지 출처를 묻지 않겠다며 마르크화의 은행권 유입을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세금 탈루 목적으로 마르크화를 비축한 독일인들은 스위스 은행으로의 계좌 이전 및 고가품 구입 등 돈세탁에 여념이 없다고 독일 언론은 전했다.
스페인에서도 일부 부유층의 부동산 매매를 통한 돈세탁이 한창이다. 이 때문에 전망 좋은 해안지역의 부동산 가격은 ㎡당 15%가량 뛰었다.
프랑스 파리 외곽 생 드니 거리의 매춘부들은 속칭 ‘파스(Passe)’라 불리는 단시간 매춘 화대를 현재의 300프랑에서 50유로(약 328프랑)로 10%가량 인상했다. “일일이 잔돈을 내주기 어렵다”는 게 인상 이유라고 프랑스 언론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