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차별철폐회의 파국 치달아…美-이 대표단 전격 철수

  • 입력 2001년 9월 4일 18시 37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리고 있는 유엔 인종차별철폐회의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이 선언문초안에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내용이 포함된 데 항의해 3일 대표단을 철수시킴에 따라 회의가 파경 위기를 맞고 있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이날 “대표단에 귀환을 지시했다”며 “증오에 가득 찬 문구를 선언문에 담아 이스라엘을 인종차별 국가로 비난하려는 노력이 전개되고 있다”고 말했다.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도 “인권을 옹호하는 회의가 증오와 근거없는 비난의 원천이 됐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이 문제삼은 선언문 초안에는 ‘시오니즘의 인종차별적 관행이 증대하고 있는데 우려한다’는 내용이 들어있다. ‘인종적 우월성에 바탕을 둔 시오니즘 운동의 출현에 대해서도 우려한다’는 표현도 있다. 초안은 인종차별 국가로 유일하게 이스라엘의 국명을 직접 거명했다.

인종차별철폐회의에 앞서 2일 폐막한 인권포럼에서도 각국 비정부기구(NGO)들은 이스라엘을 ‘인종차별 범죄국’으로 묘사하는 선언문을 발표해 미국과 이스라엘을 자극했었다.

당초 불참 의사를 밝혔다가 막판에 대표단을 파견했던 미국과 이스라엘은 이번 회의를 통해 중동 문제에 대해 유엔과의 인식 차이만 확인한 셈이다.

미국과 이스라엘은 1978년과 1983년에 각각 열린 1, 2차 유엔 인종차별철폐회의에도 불참했다. 유엔은 1975년 이스라엘 건국 이념인 시오니즘을 인종차별주의로 규정했다가 91년에 이를 철회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표단 철수에 대해 회의장 안팎에서 비판 여론이 들끓고 있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제시 잭슨 목사는 “철수 결정은 유감스럽고 불필요했다”며 “미국은 매우 중요한 것을 놓쳤다”고 말했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미국이 올바른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다른 대표단과 논의하길 희망했다”며 아쉬움을 나타냈으며 회의를 주재하고 있는 메리 로빈슨 유엔인권고등판무관실(UNHCHR)도 유감을 표명했다.

일부에서는 미국이 대표단을 철수한 것은 과거에 저지른 노예제도 실시와 인디언 탄압 등의 인권범죄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앞서 인권포럼의 이스라엘 비난 선언문 채택을 반대했던 국제 인권단체 ‘인권감시(Human Rights Watch)’는 “미국이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정치적 연막작전을 펴고 있다”고 비난했다. 한편 유럽연합(EU)과 캐나다 등 미국의 우방국들은 미국과 이스라엘의 철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회의장에 남아 대화를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홍성철기자>sungchul@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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