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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1년 4월 25일 18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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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중 24일 자민당 총재로 선출된 고이즈미 전 후생상이 26일 총리가 되고 야마사키 전정조회장은 당 2인자인 간사장으로 임명됐다. 일본 정국은 앞으로 YKK가 주무른다고 해도 될 환경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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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민당 YKK의 우정은 7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 명 모두 그해 처음으로 의원 배지를 달았다. 나이는 조금 차가 났지만 이후 ‘반골기지’로 의기투합해 차세대 리더그룹을 형성했다.
이들은 94년 최대파벌이었던 다케시타(竹下)파의 전횡에 불만을 품고 ‘클럽 신세기’를 발족시키면서 당내에 YKK라는 이름을 각인시켰다.
가토 전 간사장은 98년 미야자와파를 물려받아 당내 제2파벌인 가토파(45명)의 총수가 되면서 ‘차기 총리 0순위’로 올라섰다. 야마사키 전 정조회장도 같은 해 야마사키파(23명)를 만들었다. 고이즈미 전 후생상은 모리파의 회장이 됐다. 파벌총수급이 됐지만 오부치파, 하시모토파로 이어지는 최대파벌에 대한 이들의 반항의식은 변함이 없었다.
시련도 있었다. 지난해 11월 야당이 제출한 모리 요시로(森喜朗) 총리 불신임안에 가토파와 야마사키파가 동조할 움직임을 보이자 고이즈미씨는 모리파 회장으로서 ‘반란’을 평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사건으로 가토파는 15명의 군소파벌로 전락했고 가토씨는 총리자리에서 멀어졌다. 야마사키파도 냉대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야마사키와 가토씨가 이번 총재선거에서 고이즈미 후보를 지지했고 이에 따라 YKK 트리오 관계가 복원된 것이다.
아마사키와 가토씨는 “고이즈미 총재가 평소 약속했던 일을 강력하게 실천할 수 있도록 전폭적으로 지원하겠다”고 입을 모았다.
| YKK 신상명세 | |||
| 항 목 | 야마사키 (Y) | 가토 (K) | 고이즈미 (K) |
| 현 직 | 당 간사장, 야마사키파(23명)회장 | 가토파(15명)회장 | 당 총재, 총리내정 |
| 나 이 | 64 | 62 | 59 |
| 정계입문 | 72년, 10선 | 72년, 10선 | 72년, 10선 |
| 학 력 | 와세다대 상학부 | 도쿄대 법학부 | 게이오대 경제학부 |
| 경 력 | 방위청장관, 건설상, 당국회대책위원장(원내총무), 당 정조회장 | 외교관, 방위청장관, 관방장관, 당 정조회장, 당 간사장 | 대장차관, 후생상, 우정상 |
한편 고이즈미 신임총재는 25일 당 3역 인사에서 야마사키씨를 간사장에 발탁한 외에 정조회장에 총재경선에 나섰던 아소 다로(麻生太郞) 경제재정상, 총무회장에 호리우치파(44명) 회장인 호리우치 미쓰오(堀內光雄) 전 통산상을 임명했다.
총리비서실장 겸 정부대변인으로 요직 중의 하나인 관방장관에는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현 장관을 유임시키기로 했다.
이번 인사에서 고이즈미 총재는 파격적으로 당내 최대파벌인 하시모토파를 배제했다.
최대파벌이 당 3역 중 한명도 차지하지 못한 것은 70년대 초 미키 다케오(三木赳夫) 총리시대 이래 처음이다. 고이즈미 총재가 파벌에 관계 없이 적재적소에 인재를 등용하겠다는 약속을 지킨 것이다. 야마사키파는 당내 파벌 서열 5위, 호리우치파는 4위이며 아소 다로 정조회장은 최소파벌인 고노 그룹(12명)의 지원을 받고 있다.
고이즈미 총재는 26일 있을 각료인선에 대해서도 “파벌 총수와 상의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만약 파벌 회장이 유능하다면 그를 발탁하기 위해 만나는 일은 있을 것”이라고 못박았다.
지금까지 총리는 각 파벌 총수로부터 입각희망자 명단을 받아 파벌 세력에 따라 안배하는 것이 관례였다.
<도쿄〓심규선특파원>kssh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