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8년]퇴임할 때 지지율 더 높은 대통령

입력 2001-01-15 10:05수정 2009-09-21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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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마지막의 미국을 이끈 빌 클린턴 대통령이 백악관 8년을 마감하고 오는 20일 야인으로 돌아간다.

흔히들 굴곡이 많았던 시절을 영욕의 세월이라고 하지만 미국 역사상 클린턴 대통령처럼 재임 중 천당과 지옥을 오간 파란만장한 대통령도 없을 것이다.

건국 이래 최장기 호황을 이끌며 미국을 냉전 구도가 해체된 지구상의 초강대국으로 우뚝 세웠는가 하면 전 백악관 시용직원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을 일으켰고 거듭된 거짓말로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탄핵 위기에 몰렸던 대통령이기도 하다.

미국인 대부분이 클린턴 대통령을 떠나 보내면서 능력은 평가하되 인격에는 고개를 내젓는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연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재선에 성공한 유일한 민주당 출신인 클린턴 대통령은 대중적인 지도자로 꼽히고 있다.

USA 투데이/CNN방송/갤럽의 공동 여론조사에 따르면 클린턴 대통령의 직무 능력지지도는 68%로 인기가 높았다는 존 F. 케네디 대통령(62%)이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53%)보다도 높고 취임할 때보다 퇴임할 때 지지율이 높은 유일한 대통령이다.

클린턴 대통령이 높은 인기를 누리는 요소로는 총명한 두뇌와 훤칠한 외모에 민심을 정확히 읽는 탁월한 정치적 감각과 지칠 줄 모르는 정력 등이 꼽히고 있다.

여느 대통령은 500~600명에 이르는 백악관 행사 참가자의 이름을 옆에서 귀뜀해줘도 제대로 부르지 못해 난처한 상황이 빚어지곤 하나 명문 조지 타운대학과 예일대 법대에 옥스퍼드 유학까지 거친 그는 손님 이름의 95% 이상을 정확히 대는 놀라운 기억력을 갖고 있다.

르윈스키는 "어느 여성이나 5분만 함께 있으면 빠져들 것"이라고 실토했지만 흥이 나면 팔을 걷어붙이고 섹소폰을 불어제끼는 낭만에 부드러운 웃음을 겸비했고 남의 말을 경청하며 때로 정곡을 찌르는 그의 친화력은 대단한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대중성이 그의 인기를 모두 설명하는 것은 아니며 백악관 웹사이트(www.whitehouse.gov)에 들어가 보면 왜 국민의 지지도가 높은가를 금방 알 수 있다.

A4 용지 23장에 빼곡한 분량으로 나열된 그의 업적은 ▲2000년2월 미 역사상 가장 긴 107개월째 경기 확장 기록 ▲1992년 2천900억달러 재정 적자에서 2000년 2천300억달러 흑자 반전 ▲3년간 국채 3천600억달러 상환 ▲1993년 이래 2천220만명 신규 고용 창출 ▲실질 임금 30여년간 최대 폭 증가 ▲가구당 연간소득 4만달러 돌파▲1992년 7.5%였던 실업률은 4%로 하락 ▲2000년 2.4분기 주택보유율 67.2%로 사상최고 ▲1999년 빈곤율 11.%로 20년래 최저 ▲시간당 최저임금 인상 ▲범죄율 25년래최저 ▲코소보 공습과 유고연방 정권 교체 ▲북한 핵.미사일 개발 억제와 한반도 긴장 완화 등 경제에서 외교에 이르까지 이루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다.

민주당과 마찰이 잦아지자 민주당과 공화당을 백악관과 등거리에 놓는 3각 구도로 돌파하면서 정체성을 상실한 채 허우적대던 민주당을 재건했고 국제적으로는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 등과 '제3의 길'을 주도했다.

그러나 그는 엄청난 실수도 저질렀다.

성추문의 파괴력은 하마터면 그를 '내쫓긴 대통령'으로 만들었을 만큼 어마어마했고 앞으로도 평생 그를 평생 쫓아다니는 낙인이 될 것이다.

클린턴 부부는 '우익의 거대한 음모'라며 반격했으나 역부족이었고 성추문과 탄핵 정국으로 지샌 1998년은 '잃어버린 해'로 여겨지고 있으며 이후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별다른 업적을 남기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잘 나가던 경제가 퇴임을 눈앞에 두고 흔들리는 조짐을 보이는 것은 앨 고어 부통령의 낙선과 함께 클린턴 대통령에게 매우 안타까운 대목이며 막판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평양행과 중동평화협상이 불발탄에 그친 것도 진한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대통령 취임 당시 루스벨트와 케네디의 합작품이 되겠다고 큰소리칠 때에 비하면 머리카락이 더 희고 주름도 깊어졌지만 아직 혈기가 왕성해 "퇴임하면 언론의 관심을 끌지 않고 조용히 살겠다"는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별로 없다.

50세에 백악관을 나온 제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1901-1909) 이후 가장젊은 54세의 전직 대통령이 되는 클린턴은 자서전을 집필하며 각종 TV 토론회나 연설회의 가장 인기있는 초청자로 연간 1천만달러가 넘는 고소득을 올릴 전망이다.

그러나 주변에서는 너무나 정치적인 그가 결국 고향인 아칸소나 자신의 인기가높은 캘리포니아에서 상원의원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어 미국 역사상 첫 부부 상원의원의 탄생을 보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는 전망도 설들력있게 들리고 있다.

헌법상 제한만 아니라면 3선은 따놓은 당상이나 다름없는 그로서는 정치판을 떠날 이유가 별로 없다는 게 워싱턴 정치분석가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한반도 관계▼

오는 20일 백악관을 떠나는 빌 클린턴 미국대통령은 지난 8년의 집권기간중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해결을 위해 노력한 인물로 기록될 것으로 보인다.

클린턴 대통령은 지난 1993년 1월 취임 이후 한국과 미국간 군사.안보 동맹 및경제적 동반자 관계를 그 어느 때보다 공고하게 다지는 한편 민주주의와 인권이라는공동의 가치 추구라는 한 차원 높은 관계로 승화시키는 데 커다란 기여를 한 것으로평가되고 있다.

조지 부시 전 대통령행정부로부터 북한의 핵문제를 유산으로 물려받았던 그는 또한 북한에 대해 포용정책을 일관되게 펴 과거의 적대관계를 직접대화를 통해 문제해결을 모색할 수 있는 단계로까지 완화시키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는 점도 널리 인정되고 있다.

클린턴 대통령과 남.북한간의 이러한 관계는 역설적으로 북한의 핵과 미사일 문제가 촉매제가 됐다는 외교 관측통들의 일반적인 분석이다.

지난 1992년 선거에서 당선된 클린턴 대통령은 이듬해 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의 '문민 정부'와 거의 같은 시기에 새 행정부를 출범, 과거 군사정부의 정통성시비를 초월한 가운데 한.미 관계를 열어 나갈 수 있었다.

클린턴 대통령이 행정부 출범 직후 제일 먼저 한 대외활동중의 하나는 93년 6월한국을 방문, 김 전 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가진 일.

이는 그해 3월 초순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를 선언한 후 북한의 핵문제를 둘러싼 양국간 협의가 숨가쁘게 진행된 뒤의 일로 이 때부터 한.미간 긴밀한대북(對北)공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클린턴 대통령은 그해 11월 시애틀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 정상회담 참석차 미국을 방문한 김 전 대통령과 워싱턴에서 만나 또 한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불과 몇개월 사이 두 나라 정상이 두차례나 만나는 것은 과거 군사정권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로 북한 핵문제의 해결이라는 공동의 관심사가 촉매가됐다. 즉, 북한의 핵문제가 한미 양국관계를 돈독히 하는 연결고리의 역할을 한 것이다.

클린턴 대통령과 김 전 대통령 정부간의 이러한 공조는 한 때 불협화음이 일기도 했지만 결국 지난 1994년 북한의 핵계획 동결을 위한 "북-미 기본합의"라는 결실을 낳았다.

북-미 기본합의는 북한 핵계획의 동결이라는 액면 그대로의 의미도 중요하지만이를 계기로 클린턴 대통령이 임기말까지 추진해온 양국관계 개선의 징검다리가 됐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클린턴 대통령은 또 1996년 4월16일 김 전 대통령과 제주도에서 만나 4자회담을공동제의했는데 이 또한 그가 한반도의 궁극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 세운 또하나의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제1기 집권 초기 북한의 NPT탈퇴를 계기로 한반도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쏟았던클린턴 대통령은 1997년 초 시작된 제2기 집권기간에는 북한의 미사일문제로 신경을곤두세워야 했다.

제네바 기본합의의 이행과 관련, 북한의 핵안전협정 이행과 핵투명성 보장 등의문제 해결을 모색하던 클린턴 대통령은 재임 첫해 연말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미 양국관계를 2인3각의 협력체제로 발전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1998년 8월 북한의 장거리 대포동 미사일 시험발사를 계기로 북한문제가더욱 민감해진 가운데 김 대통령과 클린턴 대통령은 햇볕정책과 대북 포용정책으로의기가 투합,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이끌어낸다는 큰 틀을 짜냈다.

햇볕정책이 주축이 된 양국간 전례없는 공조체제는 지난해 6월에 이뤄진 남북한정상회담이라는 역사적인 성과를 낳음으로써 절정에 달했으며 그 결과 한반도의 해빙무드는 아직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미사일 개발 및 수출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노력은 클린턴 대통령이 미 대통령으로서는 사상 처음인 '북한 방문 카드'를 내걸고 임기 마지막 순간까지 해결을 시도했으나 결국 지난해 12월말 중도에서 포기, 대미를 장식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차기 행정부를 이끌 조지 W. 부시 대통령당선자는 북한측의 합의이행을 검증할 수 있는 조항이 포함된다면 클린턴행정부에서 이뤄진 대북 미사일 협상안을 수용할 용의가 있음을 내비치고 있어 지금까지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밖에 지난 1997년 한국이 금융위기를 맞았을 때 국제통화기금(IMF)을 통한 신속한 지원을 보장해 준 사실도 클린턴 대통령과 한국과의 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부분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IMF를 통해 580억 달러라는 사상 최대규모의 긴급지원을 제공토록 한 것은 물론 한국이 무너지면 동북아의 안정이 흔들린다는 지역안보에 대한미국익 차원의 고려에서 취한 조치일 수도 있지만 미국의 제2선 지원이 한국의 금융위기 해소에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한편 클린턴 대통령과 한반도와의 관계가 지난 8년동안 내내 원만했던 것만은아니며 종종 마찰이 빚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클린턴 행정부가 북한과의 핵협상을 주도하면서 북-미간의 대화가 한국을 배제한 가운데 이뤄지자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김영삼 전 대통령 정부측이 정책조율이 불충분하거나 기대에 미치지 않는다는 불만을 터뜨리면서 양국관계가 한때불편해진 적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통상분야에서도 자동차와 쇠고기 등의 둘러싼 클린턴 행정부의 대한(對韓) 시장개방 압력으로 양국이 티격태격하기도 했고 지난해에는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개정을 둘러싸고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또한 지난 주 노근리 양민학살사건의 책임규명문제를 놓고 사건 당시 미군의 지휘계통상 상부에서 발포명령을 내렸다는 증거가 없다는 구실을 내세워 미국정부의책임을 회피하고 피해자들의 요구를 외면한 채 공식 사과 대신 "유감" 표명에 그친일도 개운치 않은 부분으로 남게 됐다.

[워싱턴=이도선특파원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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