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수교 10돌 고르비 인터뷰]"남북통일 인내심 필요"

  • 입력 2000년 11월 14일 18시 43분


《한―러 수교의 주역인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69)은 수교 10주년을 맞은 현재의 한―러 관계를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으로 냉전을 종식하고 독일통일과 한―러 수교 등 20세기 세계사를 바꾸는 업적을 남긴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을 서면 인터뷰해 최근 한반도 정세 등에 관한 견해를 들었다.

91년 소련의 해체로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난 그는 고르바초프재단 이사장, 국제녹십자사(GCI)총재, 러시아 최대 민영 언론기업인 미디어모스트 이사장으로서 전 세계를 무대로 강연 저술 등의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

―수교 10주년을 맞은 현재 한―러 관계가 당초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가 많습니다. 현재의 한―러 관계와 10년간의 변화를 어떻게 평가합니까.

▼러 자원-한국 자본 결합 바람직▼

“지난 10년을 관찰해보면 한―러 관계는 단순하지도 않았고 항상 열광적이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관계발전이 더디거나 오히려 후퇴한 적도 있었습니다. 러시아와 한국이 겪었던 경제위기 같은 것이 원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은 인상적입니다. 전무(全無)의 관계에서 긴밀한 협력관계로까지 발전했습니다. 한국은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 파트너가 됐습니다. 러시아 국민은 현대 삼성 LG 등 한국 기업의 제품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러시아의 과학기술이나 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습니다.

양국관계가 가능성에 비해서는 부진하다는 평가에는 동의합니다. 새로운 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러시아는 최근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정치적 불안과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도 지나갈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것이 양국관계 발전의 가능성을 열 것입니다.”

―양국관계 발전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이 있습니까.

“정치적 의지와 구체적인 행동이 필요합니다. 경제관계를 예로 들면 러시아의 값싼 천연자원과 노동력, 기초기술과 한국의 자본 경영능력을 결합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러시아를 통해 극동을 유럽과 연결시키는 사업을 위해 남북한과 러시아의 삼각협력을 제안합니다.”

―90년에 어떤 계기로 한국과 수교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까.

“우연한 요소나 시류에 영합한 충동적인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냉전과 강대국 간의 대립, 국제적인 긴장구조를 극복하고 국제관계에서 자유로운 선택의 분위기를 만들겠다는 우리의 신사고와 새 대외정책 때문이었습니다. 또 당시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분위기도 성숙했습니다. 남북한 간의 적대관계 청산과 평화적인 대화, 민주적 통일은 한국민의 이해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한국 경제가 역동적으로 발전하면서 우리와의 협력 가능성이 켜졌습니다. 한국 경제계가 우리에게 관심이 많고 접촉을 원한다는 사실도 알게 됐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우리를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어려움도 많았습니다. (소련 공산당) 정치국에서 한두번의 회의로 결정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몇몇 정치국원이 처음에는 의심하고 반대하고 북한과의 관계나 이념 때문에 주저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건강하고 현실적인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수교 당시 인상적인 경험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러 '통일한국' 독자역할 원해▼

“내 기억으로는 당초 수교는 10월 말로 예정돼 있었습니다. 90년 6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盧泰愚)대통령과 만났습니다. 나는 당시 미국을 방문 중이었고 노대통령은 나를 만나기 위해 특별히 미국에 왔습니다. 우리가 만났던 호텔은 관광객이 주로 묵었던 곳인데 한―러 수교 후 명소가 됐다고 합니다. 우리는 서로 이 만남의 의미와 목적을 잘 이해하고 있었지만 노대통령은 상당히 조심스러워서 직설적으로 (수교 얘기를) 꺼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국제정세와 동북아정세에 대해서 얘기했습니다. 양국관계가 발전할 준비가 돼 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본심을 이해하게 됐죠. 우리는 헤어지면서 외교관계 수립은 더 기다릴 수 없다는 확신을 얻게 됐습니다. 노대통령을 그 후 모스크바와 제주도에서 각각 한 번씩 만났으며, 퇴임 후에는 94년 방한때 만났습니다.”

―최근 남북한 관계가 급진전하고 있습니다. 남북한 관계를 어떻게 전망합니까.

“통일을 방해하는 외부적 요인은 제거됐다고 생각합니다. 러시아는 강한 ‘통일 한국’이 이 지역에서 독자적인 역할을 하기를 원하는 ‘조금은 다른’ 주변강국입니다. 여러 분야에서 남북한 관계를 깊이 있게 발전시켜 점진적이고 평화적이며 민주적으로 통일로 가는 길을 열어갈 것을 충고합니다. 특히 통일을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러시아는 영구적이고 변함 없이 한국의 입장을 지지할 것으로 봅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올해 노벨평화상을 받게 됐습니다만 국내에서는 많은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선배’로서 어떤 충고를 하겠습니까.

“먼저 김대통령께 축하를 보냅니다. 이것은 남북관계 진전을 위한 그동안의 노력에 대한 평가라고 봅니다. 10년 전 나에게 주어진 과제와 지금 한국의 김대통령이 안고 있는 문제는 다릅니다. 나는 개혁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소련이라는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 싸워야 했습니다. 내가 이해하기에 김대통령은 독자적인 두 국가를 통일로 이끌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공통적으로 민주와 비폭력이라는 원칙을 믿는 것 같습니다. 김대통령이 대통령이 되기 전 한 차례 만난 적이 있는데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신념, 국제정세에 대한 해박함 등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요즘 어떤 일을 하는지요. 한국을 방문할 계획은 없습니까.

“페레스트로이카 이념과 러시아의 발전 전략, 각종 국제문제를 연구하는 고르바초프재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국제녹십자사 총재로 환경문제에도 힘을 보태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사회민주주의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외국을 다니며 여러 사람을 만나고 국제현안에 대한 의견도 밝힙니다. 한국에는 94년에 마지막으로 갔습니다. 다시 한국을 방문해 옛 친구들을 만날 기회가 있기를 희망합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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