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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0월 17일 18시 3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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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측에서 한국에 대한 불만이 이어지고 있는데다 정상회담을 비롯한 양국 고위급의 접촉도 석연치 않은 이유로 계속 불발되고 있다. 이런 상황을 촉발한 것은 결국 ‘돈’ 문제로 귀착된다는 관측이 많다.
▽푸틴 대통령 방한 문제〓현재 가시적으로 드러난 한―러 간의 가장 큰 불협화음 중 하나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방한 문제. 그는 6월 이정빈(李廷彬)외교통상부장관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연내에 한국을 방문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지난주 러시아를 방문한 이한동(李漢東)총리에게도 구체적인 방한일정을 통보하지 않아 사실상 연내 방한이 무산됐다.
푸틴 대통령이 한국 방문을 주저하는 사이 김정일(金正日) 북한 국방위원장의 내년 초 러시아 방문이 먼저 확정됐다. 푸틴 대통령은 이미 중국 일본 북한 등 동북아 주변 3개국을 방문했기 때문에 유독 한국을 제외한 것이 두드러진다.
▽러시아의 한국 홀대 실상〓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무관심’은 대한(對韓)외교의 실무책임자라 할 수 있는 외무부 한국과장이 1년째 공석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러시아 정부는 아만겔디 이르게바예프 한국과장이 병으로 쓰러진 뒤 1년이 넘도록 후임을 정하지 않고 있다. 한 외교전문가는 “러시아의 외교순위에서 한국은 30∼40위 정도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한―러 양측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잇따른 한국 고위관리의 푸틴 대통령 면담 불발이 모스크바 현지에서는 러시아의 한국에 대한 불만 내지는 무관심의 산물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총리가 푸틴을 만나지 못한 것을 비롯해 5월 러시아를 방문한 조성태(趙成台)국방장관이 “외국각료로는 처음으로 면담할 예정”이라고 호언했으나 결국 만나지 못했고 6월 이정빈 장관도 면담에 실패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특사로 남북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러시아를 방문한 반기문(潘基文)외교부차관은 푸틴 대통령은커녕 이고리 이바노프 외무장관도 만나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러시아제 잠수함 구입 불발〓러시아측은 킬로급 잠수함의 한국수출이 사실상 좌절되자 분개하고 있다. 한 해군 퇴역 장성은 “사지도 않으면서 자존심은 왜 건드리냐”고 불만을 토로했다. 러시아는 한국에 상환해야 할 약 17억달러의 경협자금 일부를 갚는 대안으로 잠수함 수출을 적극 추진해 왔다. 척당 2억5000만달러로 3척의 잠수함을 팔 경우 받을 대금 7억5000만달러 중 30%정도를 경협자금으로 상계할 속셈이었다.
특히 푸틴 대통령 취임이후 러시아는 더욱 적극적인 자세로 나왔다. 군부와 방산업계가 푸틴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지지기반이기 때문. 또 잠수함의 설계제작사인 ‘루빈’사가 푸틴의 고향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다. 푸틴 대통령은 김대중대통령과 전화 통화를 하면서 이고리 세르게예프 국방장관을 배석시켜 은근히 압력을 넣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제 잠수함의 도입은 이런 저런 사정으로 사실상 물건너 간 상태. 한국측의 관계자는 “러시아에 정식으로 (거절을) 통보하는 절차만 남았으며 고도의 정치적 결단이 있기 전에는 뒤집기 어렵다”고 전했다. 잠수함 판매가 어렵게 되자 러시아는 “협상 과정에서 한국측이 킬로급 잠수함을 ‘형편없는 고철’ 정도로 매도했다”며 분개하고 있다.
▽전망〓이같은 한―러간의 불협화음은 러시아 고위 관계자들의 마음 속에 한국에 대한 불신이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어 단시일내에 해소하기가 어려워 보인다. 러시아의 한 고위 관계자는 16일 “한국이 러시아의 잠재력을 무시하고 있다”면서 “한국측이 10년 전 수교 당시에는 미―러―일―중의 순서로 우리를 대했으나 지금은 미―일―중―러의 순서로 다루고 있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외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러시아가 ‘남북한 등거리 외교’에서 ‘친북한 정책’으로 선회하는 것이 아니냐는 관측이 벌써부터 나돌기 시작했다.
<모스크바〓김기현특파원>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