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戰 '민간인사살']유죄 金목사 피맺힌 31년

  • 입력 2000년 7월 14일 07시 13분


“15년동안 억울한 교도소 생활을 신앙으로 버텨왔습니다. 정말로 억울하지만 누구도 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충남 공주∼예산간 32번 국도변에서 유구읍에 이르러 비포장도로를 이용해 20여분쯤 더 들어가면 만천1리 만천교회가 나타난다.

▼"15년옥살이 신앙에 의지"▼

신도라고 해봤자 고작 30명인 이 교회의 김종수(金鍾水·59)담임목사. 그가 베트남 민간인들을 살해한 ‘범죄자’라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김씨는 64년 고향인 전북 정읍에서 농고를 졸업하고 이듬해 육군 갑종 간부후보생 시험에 응시, 꿈에 그리던 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66년 소위로 임관한 김씨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68년 4월 비둘기부대 경비대대 1중대 2소대장으로 베트남에 파견됐다. 맡은 직무는 치열한 전투현장의 소대장.

낮에 잠깐 눈을 붙이고 일어나 저녁부터 참호 속에서 매복하는 부하들을 독려하며 다음날 오전까지 뜬눈으로 지샜다.

운명의 7월15일. 소대원들을 이끌고 매복에 나섰다. 부하들은 며칠째 계속되는 밤샘 매복에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새벽 1시경. 소대원중 한명이 “베트콩이다”라고 소리쳤다. 눈앞에는 7명의 베트남인들이 보였다. 그들을 생포했다.

▼"한국가면 누명 벗을것…"▼

그러나 이 사건으로 그에게는 살인혐의 등이 씌워져 10개월만에 무기징역이 확정됐다.

“죽느냐 사느냐하는 전투현장에서 부하들은 분명히 적군을 사살했습니다. 그러나 현지 주민들이 ‘민간인을 죽였다’고 데모에 나서자 소대장이라는 이유로 여론무마책으로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한국으로 가면 누명을 벗을 수 있다기에 기대했는데….”

김씨는 안양교도소에 갇힌 상태에서 수차례 국방부장관 등에게 진정서를 냈으나 ‘사면이나 복권계획이 없다’는 답변뿐이었다.

절망과 좌절의 연속이었으나 신앙에 의지해 견뎠다. 그러다 83년 불혹이 넘은 나이에 가석방으로 교도소 문을 나섰다.

“국가의 부름을 받아 전투를 했는데 사형수라니요….” 김씨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김씨는 가석방후 2년만인 85년 목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서울장로신학교에 입학했다.

“옥중생활동안 나를 견디게 한 것은 제 행동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종교적 신념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목자의 길을 걷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부인 강경례(姜京禮·49·서울거주)씨도 신학교 재학시절에 만났다.

김목사는 6개월전 전도를 위해 이곳 만천교회로 오기전 다른 교회에 있을 때 이같은 과거를 감추지 않았다. 떳떳하다는 생각에서였다.

▼"파월장병 40여명 미복권"▼

김목사는 “목자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모든 과거를 덮고 관계된 사람들을 용서하고 싶지만 15년간의 옥고는 명예회복 차원에서라도 보상이 이뤄져야 한다”고 덧붙였다.

“아직도 40여명의 파월 장병은 미사면 미복권된 상태입니다. 이제는 과거의 아픈 상처를 씻고 그들도 평안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그리고 자녀들에게도 미복권자라는 불명예스러운 유산을 남기지 않도록 해주기 위해 희망을 줘야 합니다.”

<공주〓이기진기자>doyoc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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