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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5월 22일 19시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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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은 통일 10주년을 맞아 올해 처음으로 대대적인 기념 행사를 가졌다. 22일 수도 사나 등지에서 치러진 기념식에는 50여개국 1000여명 인사가 참석했다. 이 가운데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왕세제와 샤이크 사바 알 아메드 알 사바 부총리가 걸프전 이후 처음으로 예멘을 방문해 걸프전 당시의 앙금을 털어냈다. 수단의 오마르 엘 바쉬르 대통령과 야세르 아라파트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 압델아지즈 부트풀리카 알제리 대통령도 참석했다.
예멘 정부는 귀빈 방문을 맞아 2만5000명의 군경을 곳곳에 배치하고 병원에 비상 대기령을 내렸으며 휴대전화도 일주일간 쓰지 못하게 했다. 군사 퍼레이드와 폭죽놀이 등 각종 행사 비용으로 1억600만달러를 썼다.
예멘이 ‘통일10년’ 행사를 이처럼 대대적으로 치른 것은 외국인들의 투자를 이끌어내기 위한 것. 외국인 관광객이 잇따라 납치되자 외국인 투자가 끊겼다. 물론 내부 단합의 뜻도 담겨 있다. 한 현지 신문은 “통일은 모든 예멘인의 꿈이었고 우리는 그것을 이룩해냈다”며 통일 10주년의 의미를 되새겼다.
▽통일까지〓‘모카 커피’로 유명한 예멘에 분단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839년 동서무역의 중계항으로서 번성한 홍해의 항구도시 아덴이 영국에 지배당하면서부터였다. 북-남예멘은 1918년과 67년에 각각 터키와 영국의 지배에서 독립했다. 그러나 북예멘은 자본주의, 남예멘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대립이 시작됐다.
79년 11월 압둘라 살레 북예멘 대통령이 남예멘을 방문하면서 통일을 향한 물꼬가 터졌다. 국제정세도 통일 예멘의 탄생에 기여했다. 구소련이 80년대 제3세계 지원을 중단하면서 남예멘에 대한 원조를 끊어버린 것이 남-북 예멘을 가깝게 만들었다. 물적 인적 교류가 활발해진 것이다. 양측은 10차례 이상의 정상회담 끝에 90년 5월22일 평화통일을 달성했다. 북쪽의 살레가 대통령이 되고 남쪽의 알 베이드가 부통령이 됐다.
▽통일10년〓분단의 후유증은 상당했다. 양측 지도부는 군대 통합과 권력분배 등을 둘러싸고 갈등을 벌였다. 93년 7월 남예멘의 베이드 부통령이 집무를 거부하고 아덴으로 돌아가 94년 5월 분리를 선언했다. 무력충돌이 빚어졌고 같은 해 7월 아덴이 함락됨으로써 내전이 끝났다. 내전 피해는 130억달러 정도나 됐다. 당시는 예멘이 걸프전 때 이라크를 지지한 데 앙심을 품은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가 예멘 노동자 150만명을 추방한 직후라 경제가 더욱 엉망이 됐다.
예멘은 95년 IMF의 구제금융을 받고 대대적인 경제개혁에 착수했다. 연료와 생필품에 대한 국가보조금이 삭감되자 98년에는 전국적으로 IMF 개혁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살레 대통령은 통일 10주년 기념연설에서 “부채는 89억달러에서 99년말 49억달러로 줄었고 70%를 웃돌던 인플레이션도 4%로 떨어졌다”며 경제성공을 확신했다. 그러나 아직 1750만(추정) 인구 가운데 40%가 최저생계비 이하로 살고 있으며 1인당 국민소득은 780달러(98년 추정)에도 못 미친다. 외국인 관광객 피랍사건이 자주 발생하는 등 불안한 치안상황도 통일 예멘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고 있다.
사나대학 모하메드 알 마이타미 교수는 통일 예멘의 과제에 관해 “부의 편중과 부패, 비효율적 구조의 청산”이라고 지적했다.
<윤양섭기자> laila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