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워너 가의 4형제가 설립한 워너 브라더스. 1927년 세계 최초의 장편 유성영화 ‘재즈 싱어’로 대성공을 거둔 이래, ‘카사블랑카’, ‘마이 페어 레이디’, ‘용서받지 못한 자’ 등 명작들을 쏟아내며 할리우드 최고의 스튜디오로 자리 잡았죠.
거듭된 인수합병으로 워너 브라더스 모기업 이름은 계속 바뀌었는데요. 1990년엔 시사잡지 타임과의 합병으로 ‘타임 워너’가 됐고요. 2000년엔 미국 PC통신 기업 AOL이 당시 세계 최대 규모(1820억 달러)의 M&A를 하면서 ‘AOL 타임 워너’로 바뀌었습니다. 하지만 닷컴버블 붕괴로 AOL이 추락하면서 ‘최악의 M&A’라는 평가와 함께 2009년 갈라섰고요(이름은 다시 ‘타임 워너’가 됨). 2018년 미국 통신사 AT&T가 845억 달러에 인수하면서 사명이 ‘워너 미디어’로 바뀝니다.
데이비드 자슬라브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CEO. 변호사 출신인 그는 NBC 유니버설을 거쳐 2006년부터 디스커버리의 CEO를 지냈다. 영화 제작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던 그는 2022년 워너 브라더스 인수로 단숨에 ‘할리우드의 거물’이 된다.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제공하지만 통신과 콘텐츠의 시너지를 내기란 쉽지 않았고, 비싼 인수가 때문에 빚만 잔뜩 쌓였는데요. 매각을 고민하던 AT&T에 흑기사로 등장한 게 바로 데이비드 자슬라브 디스커버리 CEO였습니다. 네, 다큐멘터리로 유명한 케이블TV 채널 디스커버리 말이죠.
디스커버리는 워너 미디어를 430억 달러에 인수해 2022년 4월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를 탄생시켰습니다. 이제 이 기업은 이런 사업을 아우릅니다. 워너 브라더스(영화), DC 엔터테인먼트(슈퍼맨과 배트맨), HBO(TV 드라마), 디스커버리(다큐멘터리), CNN(뉴스), HBO 맥스(OTT).
거대 미디어 기업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를 이끌게 된 자슬라브 CEO. 그는 인수 직후 ‘잭 워너(워너 브라더스 창립자)의 그 유명한 워너 브라더스 급수탑을 물려받았구나’라며 꽤나 감격했다는데요.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선 무명에 가까웠던 그는 단숨에 ‘할리우드의 새로운 거물’로 올라섭니다. 그리고 이 거물이 할리우드를 대혼란에 빠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죠.
엔터 기업을 쥐어짜는 방법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주주들이 자슬라브 CEO에 부여한 과업은 단순했습니다. 바로 ‘비용 절감’이었죠. 앞서 두차례의 인수 합병(2000년 AOL, 2018년 AT&T) 과정에서 불어난 막대한 부채(2022년 당시 500억 달러)의 늪에서 탈출하려면, 어떻게든 쥐어짜야만 했으니까요. 그가 이사회에서 부여받은 목표치는 ‘2년간 30억 달러(4.4조원) 비용 감축’이었습니다.
엔터테인먼트 기업은 어떤 식으로 비용을 감축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안 만들면 됩니다. 제작을 멈추거나 취소하는 거죠. 아이러니하게도 돈은 관객들이 보지 못하는 데서 나오는 법입니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워너 브라더스엔 이 방식으로 쥐어짤 수 있는 여지가 충분했죠.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제작이 줄줄이 취소되기 시작합니다. 프로그램 취소와 함께 고용됐던 작가, 프로듀서 등도 줄줄이 해고됐고요.
영화 ‘배트걸’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레슬리 그레이스의 모습. 이 영화의 갑작스런 제작 중단 결정은 업계를 큰 충격에 빠뜨렸다. 레슬리 그레이스 X 게시물그중 가장 놀라운 결정은 영화 ‘배트걸’ 제작 중단이었습니다. 제작비 9000만 달러(약 1318억원)짜리 이 영화는 스코틀랜드에서 촬영을 마친 뒤 막바지 후반작업 중이었는데요. 2022년 8월, 자슬라브 CEO는 거의 완성된 ‘배트걸’의 제작 중단과 폐기를 결정합니다. 할리우드는 충격에 빠졌죠.
왜 그랬을까요. 영화 개봉을 위해 마무리 작업과 마케팅에 수천만 달러를 더 쓰느니, 차라리 제작비 9000만 달러를 손실로 처리해서 그에 해당하는 세금(연방 법인세율 21%, 뉴욕주 법인세율 7.25%) 수천만 달러를 아끼는 게 낫다고 본 겁니다.
자슬라브 CEO는 이 결정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제작비로) 1억 달러를 썼는데, 개봉하지 않으면 다 날아가 버립니다. 문제는 이 영화를 극장 개봉하고 홍보에 3000만~4000만 달러(약 440억~586억원)를 더 써야 하는가입니다. 회사의 건전성 때문에 우린 그런 결정(제작 중단)을 내려야 했어요. 그 결정에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했죠.”
신규 콘텐츠 제작만 중단된 게 아닙니다. 2022년 HBO 맥스의 라이브러리에선 수십 개의 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시리즈가 조용히 삭제됐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어린이 프로그램 세서미 스트리트의 에피소드 200편도 하룻밤 만에 사라졌죠. 왜? 이 역시 비용 절감 때문입니다.
비용 절감에 올인한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는 결국 2024년 말 세서미 스트리트와의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1969년부터 방송된 세서미 스트리트가 폐지 위기에 몰렸지만, 올해 넷플릭스와의 계약으로 제작이 가능해졌다. 세서미 스트리트 제공프로그램이 플랫폼에 올라가 있는 동안엔 출연자·제작자에 지불되는 비용이 있는데요. 이걸 내려버리면 플랫폼 입장에선 이 비용이 제로가 되죠. 물론 출연자·제작자 입장에선 갑자기 수입이 끊기는 거지만요.
또 보통 콘텐츠 비용은 여러 해로 나눠 회계처리하는데요. 아직 이 기간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콘텐츠를 삭제하면, 남은 비용에 대해 한꺼번에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즉, 세금을 줄이려고 이 기간이 남은 프로그램을 골라 삭제한 거죠. HBO 오리지널 콘텐츠의 경우, 이렇게 HBO 맥스에서 내려가면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는 완전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자슬라브 CEO가 왜 ‘할리우드에서 가장 미움 받는 인물’로 불리게 됐는지 아시겠죠. 그는 프로그램 제작에 투입된 수많은 노력, 팬들의 신뢰 따위는 안중에 없는 냉정한 경영자입니다. 그 결과, 그는 목표치를 초과해 40억 달러 비용 절감에 성공했습니다.
그 공로로 2024년 그는 무려 5190만 달러(약 760억원)의 보상을 받았습니다. 참고로 이는 넷플릭스 테드 사란도스 CEO의 보수(6190만 달러)와 비교해도 큰 차이 없는데요. 다른 점라면 넷플릭스는 그해 87억 달러(12.7조원) 이익을 기록한 데 비해,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는 110억 달러(16.1조원) 적자를 냈다는 점이죠.
HBO 맥스의 황당한 리브랜딩
단기적인 비용 절감을 위해 수년간 공들인 콘텐츠들을 희생시키는 게 과연 맞는 방향일까요. 지극히 회의적이지만, 그래도 이 부분에선 찬반이 엇갈릴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자슬라브 CEO가 한 일 중 누가 봐도 명백한 실패작은 이거였습니다. HBO 맥스의 리브랜딩.
2023년 5월 23일, 워너 브라더스의 창립 100주년을 기념하는 성대한 파티가 프랑스 칸영화제에서 열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날, 스트리밍 서비스 ‘HBO 맥스’가 ‘맥스(MAX)’로 이름을 바꾸고 새출발했죠. 디스커버리의 다큐멘터리 콘텐츠까지 흡수해 더 큰 서비스로 재탄생한 겁니다.
‘믿고 보는 드라마’로 유명한 HBO의 대표작 ‘왕좌의 게임’.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는 2020년 유료 스트리밍 서비스 ‘HBO 맥스’를 출시했지만, 2022년 브랜드명을 ‘맥스’로 바꾸며 ‘최악의 리브랜딩’이란 평가를 받았다. HBO 제공뭐? 이름에서 HBO를 뗀다고? 모두 귀를 의심했습니다. 왜? HBO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완성도 높은 고품질 콘텐츠’를 상징하거든요. 수십 년 동안 어렵게 구축한 고급 브랜드를 스스로 버리고, 아무 의미도 없는 이름 ‘맥스’를 택한다? 너무 이상한 거죠.
비판과 조롱이 쏟아졌습니다. 당시 넷플릭스 CEO 테드 사란도스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죠. “정말 깜짝 놀랐어요! HBO의 행보를 지켜봤는데, 한때 HBO, HBO Go, HBO Now, HBO 맥스까지 있었죠. 그래서 저는 ‘본격적으로 하려면 그 모든 이름이 사라지고 그냥 HBO만 남게 될 거야’라고 말했어요. HBO가 사라질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자슬라브 CEO는 ‘HBO’의 프리미엄 이미지가 고객 확장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했다고 합니다. 더 넓은 대중에게 어필하기 위해 HBO 브랜드를 일부러 지운 거죠. 대신 더 저렴하고 편안한 디스커버리의 리얼리티쇼와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을 가져와서 정체성을 흐렸고요. 지극히 평범하고 무난한 이름(맥스)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이 파격적인 시도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2년 뒤인 2025년 5월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는 ‘맥스’의 간판을 갈아 끼운다고 발표합니다. 새 이름은? 놀랍게도 다시 ‘HBO 맥스’가 됐죠. 돌고 돌아 다시 제자리. 이전 리브랜딩이 완전히 실수였음을 인정한 겁니다. 그동안 컨설팅과 로고 제작에 든 비용, 직원들이 이에 쏟은 시간 등을 생각하면 최소한 수백만 달러를 허비한 셈 아닐까요.
올해 5월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가 ‘맥스를 HBO 맥스로 다시 리브랜딩한다’는 내용을 발표하는 공식보도자료와 함께 공개한 밈. 드라마 ‘프렌즈’에서 로스가 ‘우린 잠시 헤어진 상태였어!(그러니까 이건 바람핀 게 아니라는 변명)’라고 외치는 유명한 밈이다. 어차피 리브랜딩과 관련해 조롱받을 게 뻔하니, 자학개그를 한 셈. 프렌즈 시리즈는 HBO 맥스가 독점 제공 중이다.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슈퍼맨도 못 구할 워너, 믿을 건 매각뿐
3년 연속(2022~2024년) 적자. 무자비한 비용 절감에도 여전히 과중한 부채(2025년 6월 기준 380억 달러). 2025년 봄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주가는 10달러 밑으로 떨어졌고, 3대 신용평가사는 모두 신용등급을 ‘투기등급’으로 낮췄습니다.
이래서는 제아무리 슈퍼맨이 와도 구하기 어려울 지경. 실제 2025년 7월 개봉한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의 ‘슈퍼맨’은 4억 달러 넘는 수익을 올렸지만, 가라앉는 기업의 운명을 블록버스터 영화만으로 되돌리기란 역부족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웬걸. 9월 이후 주가가 급등세를 보이면서 두 달 새 100% 넘는 상승률을 기록했죠. 처음엔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가 매각될 거란 소문 때문이었고요. 10월 21일 이사회는 회사의 일부 또는 전체 매각을 포함해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겠다며 이를 공식화했죠. 공지한 예비 입찰의 마감일은 11월 20일. 곧 레이스가 시작됩니다.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의 최근 6개월 주가 추이. 6개월 만에 161%나 급등했다. 18일(현지시간) 종가는 23.69달러로, 한달 여 전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가 비공개로 제안했던 인수가 23.5달러를 넘어섰다. 인수전 흥행에 대한 기대가 반영된 것. 언론에선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측이 인수가로 주당 30달러를 요구하고 있다고 전한다. 구글 금융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곳은 파라마운트 스카이댄스.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를 통째로 인수 합병해, 넷플릭스나 디즈니에 맞설 거대 미디어 기업을 만든다는 구상입니다. 이 기업 데이비드 엘리슨 CEO는 이미 10월 중순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측에 주당 23.5달러의 인수가를 제안해 업계를 놀라게 했죠. 하지만 “가격이 낮다”는 이유로 일단 거절당했는데요.
여기서 특히 중요한 건 데이비드 엘리슨 CEO의 아버지. 바로 오라클 창업자이자 세계 2위 부자(순자산 2770억 달러) 래리 엘리슨이죠. 그만큼 자금력이 엄청날 뿐 아니라, 트럼프 정부의 지지도 받고 있습니다.
이에 맞서는 거물급 후보는 바로 넷플릭스. 넷플릭스는 케이블 채널을 제외한 스튜디오(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 제작)와 스트리밍(HBO 맥스) 부문만 인수를 적극 검토 중이라는데요. 넷플릭스로선 배트맨과 해리포터 지식재산권(IP)을 탐내지 않을 수 없겠죠. 워낙 돈 잘 버는 기업이니 자금력은 문제없고요. 규제 장벽이 관건입니다. 넷플릭스의 스트리밍 시장 지배력이 너무 커지기 때문에 반독점법 위반이란 지적이 벌써부터 나오죠.
아울러 미국 케이블 시장 1위 기업 컴캐스트 역시 관심을 보이는데요. 부채가 많은 기업이라 인수 자금 마련에 파트너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컴캐스트 CEO 브라이언 로버트가 최근 사우디아라비아를 방문해, 사우디 공공투자기금(PIF) 관계자를 만났다죠. 사우디가 컴캐스트와 손잡고 인수전에 뛰어들 거란 추측이 파다합니다.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의 2025년 흥행 영화 슈퍼맨.쟁쟁한 3대 엔터테인먼트 기업이 겨루는 가운데 사우디아라비아 변수까지. 이거, 인수전이 상당히 흥미진진해지는데요. 아무리 미디어 환경이 급변한다고 해도, 워너 브라더스는 여전히 모두가 탐내는 할리우드의 보석인가 봅니다.
이번 매각이 잘 마무리돼 주주들이 높은 수익률을 올린다면 자슬라브 CEO로선 성공적인 임무 완수이겠죠. 비록 ‘할리우드의 파괴자’란 평은 피할 수 없겠지만요. 부디 이번 워너 브라더스 M&A는 이전과 달리 재앙이 아닌 해피엔딩으로 기록될 수 있기를. By.딥다이브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는 올해 에미상 시상식에서 170번이나 후보에 오르면서 여전히 저력 있는 스튜디오라는 걸 보여줬습니다. 케이블TV 사업의 쇠퇴와 스트리밍 서비스 부문의 막대한 적자로 전체 실적은 부진하지만, 엔터테인먼트 영역에선 대단한 기업임엔 틀림없죠. 누가 새 주인이 될지, 한번 지켜보시죠. 주요 내용을 요약해드리자면.
-102년 된 할리우드 스튜디오, 워너 브라더스가 다시 매물로 나왔습니다. 2022년 디스커버리의 인수로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가 된 지 3년여 만입니다.
-그동안 워너 브라더스는 대혼란을 겪었습니다. 자슬라브 CEO는 대대적인 제작 중단과 프로그램 삭제 등 비용 절감에 올인했고요. 그 과정에서 제작자들은 큰 충격에 빠졌습니다. 그는 ‘할리우드에서 가장 미움 받는 인물’이 되어버렸죠.
-무엇보다 스트리밍서비스 ‘HBO 맥스’를 ‘맥스’로 리브랜딩한 게 패착이었습니다. 50년 넘게 구축해온 HBO 브랜드를 스스로 버렸던 거죠. 결국 올해 다시 ‘HBO 맥스’라는 이름으로 돌아옵니다.
-빚더미에 앉은 채 주가가 추락했던 워너 브라더스 디스커버리. 하지만 이를 사기 위해 다시 쟁쟁한 엔터 기업들이 인수전에 뛰어들었습니다. 파라마운트, 넷플릭스, 컴캐스트. 이 3강이 겨루는 가운데, 사우디 공공투자기금이 파트너로 참여할 거란 관측까지 나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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