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이나 마을묘지 금지”… 일제의 묘지 규제, 경성의 경계를 넓히다[염복규의 경성, 서울의 기원]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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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양반 선산-평민 북망산 관행… 일제 도시계획 일환으로 묘지 관리
규칙으로 “공동묘지 매장” 의무화… 19개 공동묘지로 경성 외곽 재편
낯선 자와 합장 꺼렸지만 문화 돼… 인구 증가-도심 개발 가속화 불러
1936년 12월 경성부가 남산주회도로 개통에 맞춰 기존 이태원 묘지의 무연고 묘를 망우리로 이장한 뒤 세운 ‘이태원묘지무연분묘합장비’. 현재 서울 중랑구 망우역사문화공원 안에 있다. 염복규 교수 제공
《일제의 묘지 통제가 불러온 것
1914년 6월, 조선 후기 민씨 척족 세력의 중심 인물이었던 민영익이 20여 년의 망명 생활 끝에 중국 상하이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시신이 인천항에 도착하자 친척인 백작 민영린과 남작 민영기 등이 조선헌병대 사령관이자 총독부 경무총장인 다치바나 고이치로(立花小一郎)를 찾아가 선산 매장을 허락해 달라고 청원했다. 다치바나는 이를 단호히 거절했지만 민영린은 다시 그를 찾아 간청한다. 결국 다치바나는 매장을 허락했다. 시신을 선산에 매장하는 간단한 장지 문제였지만 당시에는 거물급 친일 귀족의 요청조차 한 번에 통하지 않았다. 가문의 선산에 시신을 매장하는 행위가 원칙적으로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염복규 서울시립대 국사학과 교수 조선시대 전통적인 매장 관행은 가문의 선산이 있는 양반은 선산에, 그렇지 못한 평민은 마을 부근의 정해진 묘역에 시신을 매장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한 마을 사람들이 함께 묘를 쓴 산을 보통 ‘북망산(北邙山)’이라고 불렀다. 중국 허난성 뤄양 북쪽에 있는 작은 산 이름에서 비롯된 말이다. 그 일대의 풍광이 수려해 고대 중국 상류층이 묘지를 조성하면서 점차 묘지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쓰이게 됐다.
일제는 병합 이전부터 조선의 묘지 관리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철도 부설 과정에서 도성 밖 남대문정거장(현 서울역)의 부지를 정할 때나, 용산에 일본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토지를 수용할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주민들의 거주지 문제도 있었지만 마을 주변에 넓게 퍼져 있는 묘지 공간을 둘러싼 분쟁이 많았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묘지의 증가와 확산을 신속하게 통제하고, 일제가 규정한 ‘위생적’ 장묘 제도를 보급하기 위해 움직였다. 1912년 ‘조선형사령’과 ‘조선민사령’ 등 기본 통제 법령을 마련한 데 이어 ‘묘지·화장장·매장 및 화장 취체규칙’(묘지규칙)을 서둘러 공포했다. 묘지규칙의 요지는 사유지라 하더라도 선산이나 북망산으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모든 시신은 관이 지정한 공동묘지에만 매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묘지규칙이 공포되자 경성부도 그에 따라 관영 공동묘지 19곳을 발표했다. 새롭게 지정한 것은 아니며 기존의 북망산 중 일부를 행정상 공동묘지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나머지 북망산에는 자연스럽게 매장이 금지되고, 다른 개발의 여지가 생겨났다. 지정된 공동묘지의 위치는 고양군 용강면 아현리, 은평면 신사리, 한지면 수철리(현 서울 성동구 금호동), 신당리, 이태원리, 숭인면 미아리 등이었다. 대체로 경성 행정구역 경계 밖이면서도 비교적 도심과 가까운 외곽 지역이었다. 이후 1930년대 초까지 경성부는 이태원, 미아리 묘지를 확장하고 은평면 홍제내리와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 일대를 새 공동묘지로 지정했다.
경성부는 이 중 확장한 이태원 묘지를 ‘모범묘지’라고 이름 붙이고 홍보했다. “조선에서 개량할 것이 허다한 중 분묘에 대한 악폐보다 급무되는 것이 없음은 풍속 및 위생, 기타 사회의 공안을 해하는 것은 대개 이로 인하여 배태되는 바라 이번에 묘지규칙이 발포되어 점차 각지에 시행됨으로 악풍이 점차 개혁되는 금일에도 오히려 불만의 소리를 내는 자가 있음에 당국에서 항상 묘지규칙을 설정한 진의를 설명하는 중이나 입화(立花·다치바나) 경무총장은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여 경성에는 모범적 공동묘지를 설치하여 일반에게 이를 볼 수 있게 할 계획으로 대신, 귀족으로부터 차부(車夫), 마정(馬丁)까지라도 경(境)을 접하고 매장케 하는 모범묘지를 조성하여 묘소의 경역을 청결하게 할진대 스스로 숭고하는 마음을 일으킴에 족할지니 자연 미신적 관념도 일소될 것이라고 했다.”(매일신보·1914년 6월 21일)
일제가 모범묘지 계획까지 세운 이유는 사람들이 여전히 공동묘지 매장을 꺼렸기 때문이다. 가문 일족의 묘지인 선산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전통적인 북망산 역시 단순한 묘역이 아닌 ‘마을 공동체의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에게 누군지 알 수 없는 이와 함께 묻혀야 하는 공동묘지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이로 인해 금지령이 내려진 뒤에도 가족 중 누군가가 사망하면 몰래 종래의 선산이나 북망산에 ‘암장(暗葬)’하는 사건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경성 교외의 한 공동묘지 모습. 사진 출처 국가편찬위원회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공동묘지 제도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 갔다. 도심과 가까운 묘지부터 차례로 가득 차 더 이상 매장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한편 1920년대 중반 들어 이촌향도(移村向都)로 인구가 급증하면서 외곽 지역을 경성에 편입해 주택지로 개발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났다. 그 결과 신당리·아현리 묘지 등이 도시 확장의 방해 요소로 지목돼 이 지역 내 묘지를 이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939년 도시계획 추진 등을 이유로 경성부가 발표한 공동묘지 배치 계획도. 왼쪽 상단부터 시계 방향으로 빨간 원으로 표시된 곳은 공동묘지 구역으로 결정된 신사리, 미아리, 망우리, 언주면, 구로리 묘지 위치. 사진 출처 국가기록원경성부는 행정구역을 확장하고 도시계획을 추진하면서 1939년에 도시 구역 내 공동묘지를 완전히 정리하고 외곽에 부채꼴 형태로 5개의 묘지를 배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미 존재하던 신사리, 미아리, 망우리 묘지를 확장하고, 새롭게 한강 이남인 시흥군 북면 구로리와 광주군 언주면(현 서울 강남구 일대)에 묘지를 신설하겠다는 구상이었다. 일제강점기 내내 경성의 공동묘지는 점차 외곽으로 밀려났다. 이는 같은 시기 도시화와 인구 증가의 흐름을 고스란히 반영한 변화였다.
그런데 묘지의 이전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식민지 권력은 묘지를 필요할 때 개발할 수 있는 예정지로 봤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죽은 자의 안식처를 빼앗는 일이기도 했다. 그나마 후손이 남아 있어 이장을 할 수 있는 경우는 나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다. 경성부가 분묘 이장 공고를 내도 아무도 찾지 않는 ‘무연고 묘’가 많았고, 이들은 한꺼번에 이장해 합장되거나 개발 과정에서 유골이 흩어져 버리는 경우도 있었다.
병합 초기 일제가 모범묘지로 조성했던 이태원 묘지도 1930년대 중반 들어 폐지의 기로에 섰다. 1920년대부터 일본인 중산층을 중심으로 요구가 많았던 이른바 ‘남산주회도로(南山周回道路·현 이태원로 일대)’ 건설이 본격화됐기 때문이다. 삼각지에서 출발해 남산의 남쪽 자락을 돌아 신당리에 이르는 남산주회도로를 건설하면서 양쪽 도로변은 일본인 중산층을 위한 고급 주택지로 개발할 예정이었다. 도로 개설 소식이 전해지자 이른바 ‘문화주택지’ 개발업자들이 속속 움직이기 시작했다. 경성부는 1935년 이태원 묘지의 분묘를 망우리로 이전하기로 하면서 이전 공고를 냈다.
남산주회도로는 1936년 말 준공했다. 이어 이태원 묘지 구역의 일부가 한남토지구획정리지구로 지정돼 개발이 추진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태원 일대의 개발은 계획대로 진척되지 못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면서 경성의 도시계획에 배정된 예산이 원활하게 투입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49년 11월 30일 조선일보는 “이태원 묘지의 분묘 1만여 기를 이장하고도 아직 3000여 기가 남아 있는데, 이를 완전히 이전하고 이 지역을 월남민, 해외 귀환 동포를 위한 주택지로 개발하겠다”는 서울시의 계획을 보도했다. 이로 미뤄볼 때 1945년 광복 때까지도 이태원 묘지는 완전히 정리되지 못한 채 어정쩡한 상태로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39년 일제가 마지막으로 설정한 다섯 곳의 공동묘지는 1960년대 들어 서울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고 외곽 지역이 시가지로 개발되면서 차례로 사라졌다. 유일하게 남은 망우리 묘지도 1973년 만장(滿葬)되면서 추가 매장이 중단됐다. 그 뒤 망우리는 점차 묘지라기보다는 공원으로 인식돼 오늘날의 망우역사문화공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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