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갑식]임권택 감독의 마지막 캐스팅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4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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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식 문화부장
김갑식 문화부장
온통 선거에 세상의 이목이 집중됐던 13일. 선거와 관련한 속보가 쉴 새 없이 전해지던 때에 개인적으로 특별한 ‘시간여행’을 경험했다. 다음 날 문화면 ‘요즘! 어떻게?’란 기획에 실릴 임권택 감독(82)의 인터뷰 기사를 손보면서다.

후배 영화담당 기자의 꼼꼼한 취재에 데스크로서는 별로 할 일이 없던 차에 “임 감독님 만나 뵌 느낌이 어떤지” 물었더니 뜻밖의 답이 돌아왔다. ‘임 감독 버전’으로 말을 옮기면 대강 이렇다. “김 기자(필자)랑 같이 일해요? 십수 년 전인데 프랑스 칸영화제도 같이 갔고 잘 알죠. 그 양반이 늙은 내가 문자메시지를 배워 스태프에게 보낸다는 기사를 덜컥 내보내 한참 화제가 됐죠. 허허.” 짐작대로라면 길지 않은 이 말에 1분쯤은 족히 걸렸을 것이다. 아, 어 하며 말도 몇 번 끊겼을 것이다.

문자메시지,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15년 전인 2001년 사연이다. 당시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던 그와 문자메시지는 잘 어울리지 않았다. 이미 60대의 거장이었던 그의 스타일은 시나리오보다는 매일 현장에서 느끼는 감에 의해 촬영을 진행하는 것이었다. 시나리오는 삭히고 삭히는 과정을 거쳐 머리와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영화담당 기자 시절이던 2000년으로 거슬러간다. 배우 조승우의 영화 데뷔작인 ‘춘향뎐’ 때였다. 임 감독은 이 작품으로 우리 영화로는 최초로 칸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지금이야 해외 영화제 수상이 드문 일도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영화계의 오랜 염원이었다. 현지에서 진행되는 인터뷰와 시사회, 그리고 해외 언론 반응까지 가까이서 지켜봤다. ‘국가대표’라는 책임감이 임 감독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었다.

2001년 영화 ‘취화선’과 관련한 인터뷰 때의 일이다. 그는 끊은 지 10년이 넘었다는 담배를 수시로 물었다. 그러면서 ‘그놈의 노장, 그놈의 칸 소리!’라며 손사래를 쳤다. 결국 이듬해 그는 이 작품으로 감독상을 받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사연들은 점점 추억이 됐다. 심지어 문자메시지 기사는 다시 찾아보고서야 무릎을 쳤다. 하지만 더 선명해지는 기억도 있다.

임 감독은 어눌한 말로 알려졌지만 심중을 정확히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달변가였다. 그가 곧잘 언급하는 세계일화(世界一花·세계는 한 송이 꽃)는 영화 외길을 걸어온 그의 세계를 단박에 보여준다. 여기에 누구를 보더라도 자신을 낮추는 겸손함과 예측불허의 유머가 있다. 인터뷰 당시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조금 늦는 결례를 범하게 됐고, 한여름이라 아이스크림을 사 갔다. “이거 캐스팅을 위한 로비 아냐? 어쨌든 시간 비워 둬요. 하하.” 출연료는 없지만 알맞은 배역이 있다는 유쾌한 농담이었다.

14일 오전 모처럼 임 감독과 통화를 하며 103번째 작품에 대해 묻자 그는 “제가 인기 감독이 아니잖아요? 몸도 그렇고. 감당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죠”라고만 했다.

세상의 이른바 원로(元老)와 지도자, 중진들이 앞다퉈 국민을 위한다면서도 자신의 사심을 말해온 게 요즘 세태다. 특히 원로라는 이름을 쓰는 단체는 많아졌지만 정작 그 무게는 떨어졌다. 원로는 자연 연령뿐 아니라 누군가가 증거로서 남긴 삶, 겸손과 포용의 품격이 더해져야 비로소 완성된다.

총선 다음 날 승자와 패자가 있고, 기쁨과 좌절이 넘치고, 산적한 과제와 그 해법에 대한 고민 등이 떠오르는 아침이다. 그런데 오리무중이다.

임 감독이 사회를 다룬 영화를 다룬다면 주인공은 누구일까. 그 마지막 캐스팅이 궁금하다.

 
김갑식 문화부장 dunanworld@donga.com
#임권택#103번째작품#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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