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 작품은 왜]기대주 ‘제중원’이 못 뜨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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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2월 25일 16시 5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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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 제중원은 서양 의술로 '인명(人名)은 재천(在天)'이라는 조선 민중의 의식을 바꿔놓은 개화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다.

이렇듯 매혹적인 제중원이 2010년 새해 벽두부터 이기원 작가와 홍창욱 PD의 손을 거쳐 근대 역사드라마 '제중원'(SBS)으로 재구성됐다.

‘하얀 거탑’의 작가와 ‘신의 저울’의 PD가 만나 제대로 된 의학 사극을 보여줄 것이라 관심을 모았던 ‘제중원’이 기대만 못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사진제공 SBS
‘하얀 거탑’의 작가와 ‘신의 저울’의 PD가 만나 제대로 된 의학 사극을 보여줄 것이라 관심을 모았던 ‘제중원’이 기대만 못하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사진제공 SBS


화제가 됐던 드라마 '하얀 거탑'(2007년)과 '신의 저울'(2008년)은 각각 '의사들이 병원에서 연애하는 이야기'와 '변호사들이 법정에서 연애하는 이야기'라는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의학드라마와 법정드라마의 역사를 다시 쓴 것으로 평가받았다.

'하얀 거탑'의 작가와 '신의 저울'의 연출자가 함께 작업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제중원'에 대한 대중의 기대감은 남달랐다. 한 날 한 시에 첫 방영을 시작한 '공부의 신'(KBS2)이나 '파스타'(MBC)와의 시청률 경쟁에서 '제중원'이 2% 정도의 차이로 동시간대 1위를 기록한 것도 이러한 기대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일등이 될 수는 있지만, 아무나 일등이 될 수 없는 것이 바로 개그 프로그램의 유행어처럼 '일등만 기억한 더러운 세상'의 현실이었다.

1위로 출발한 '제중원'이 덫에 걸린 까닭

'제중원'은 명문대에 대한 대한민국의 욕망을 등에 업은 '공부의 신'과 이탈리아 레스토랑을 배경으로 요리를 사랑하는 남자와 사랑을 요리하는 여자의 달콤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파스타'에 밀리면서 점점 상대적으로 저조한 시청률을 기록하는 수모를 겪었다.

1회 시청률 1위에서 졸지에 3위로 밀리며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을 개탄해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명문대 입시 공부의 비법'을 알려주겠다며 학벌지상주의와 사교육을 부추긴다는 비판을 덮어버린 '공부의 신'이 시청자를 유혹하는 사이, 또 '내 주방에 여자는 없다!'를 외치는 셰프에 맞서 주방보조가 요리사와 여자의 존재감을 입증하며 사랑을 요리하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사실 '제중원'에는 이 두 드라마를 뛰어 넘을만한 감동 요소가 많다. 특히 봉건적 신분제가 엄존하는 현실에서 천민이라는 출신 성분을 숨기고 의학 공부에 도전, '의술(醫術)'이 아닌 '인술(仁術)'을 실천한다는 스토리 라인은 감동을 주기에 충분하다. 그런데도 왜 시청률은 주춤하게 된 걸까.

전문 의학드라마로서, 전문성과 감동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평가받은 MBC ‘하얀 거탑’. 사진제공 MBC
전문 의학드라마로서, 전문성과 감동을 동시에 지닌 것으로 평가받은 MBC ‘하얀 거탑’. 사진제공 MBC


조선 최초의 근대식 진료기관이자 교육기관이었던 '제중원'은 밀려드는 서양 열강의 압박과 근대화라는 시대적 과제가 응축된 공간이다.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병원의 긴박감과 천민과 양반, 남성과 여성이 함께 의술을 배우는 교육의 감동이 교차하는 공간이 바로 제중원인 것이다.

따라서 드라마 '제중원'은 개화의 상징과도 같은 조선 최초의 근대식 병원, 봉건적 신분제가 분명했던 시기에 역관의 딸을 중심으로 한 천민과 양반의 자제 간의 삼각관계, 자전거와 스케이트 등의 매력적인 서양 문물, 조선을 향한 일본과 서양 열강들의 치열한 각축 등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킬만한 요소를 골고루 가지고 있는 근대 역사드라마이다.

하지만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이 드라마에서는 생사가 엇갈리는 병원의 긴박감, 신분을 초월한 사랑의 애절함, 처음 접하는 서양 문물에 대한 호기심, 세계열강들의 각축전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조선의 절박함이 씨줄과 날줄로 엮이지 못한 채 파편화되어 있다.

매우 흥미로운 극적 요소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이야기의 구심점이 없다는 것이 드라마의 재미를 떨어뜨리는 근본적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흥미로운 극적 요소들을 유기적으로 구성하지 못함으로서 극적 긴장감을 유발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시청자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말았다.

'격변(激變)'의 시기는 매혹적이다. 일상에서 허용되지 않거나 금기시되었던 것들이 가능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격변의 시기인 개화기를 배경으로 한 '제중원'이 방영 전부터 화제가 됐던 것이다.

감동적 소재의 유기적 결합 아쉬워

하지만 문제는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때, 격변의 시기는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제중원'은 '황정(박용우 분)'과 '백도양(연정훈)', 그리고 '유석란(한혜진)'을 중심으로 격변기를 살았던 청춘남녀의 일과 사랑을 재구성함으로써 지금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하겠다는 의도로 제작된 드라마이다.

따라서 주인공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격변의 시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갈등과 대립은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요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황정과 백도양이 의학과 사랑 때문에 갈등하고 대립하는 과정에서 극적 긴장감을 이완시키는 모순에 빠지고 말았다. 아무리 신분제가 붕괴돼 가던 개화기라 하더라도 여전히 천민과 양반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출신 성분에 근거한 황정과 백도양의 대립이 팽팽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기는 어렵다.

황정은 백정으로 태어나 멸시와 조롱을 딛고 마침내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조선 최초의 외과의사가 된 입지전적인 인물. 백도양은 양반의 아들로 태어나 1인자의 삶을 살다가 서양 의학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황정에게 밀려 2인자로 전락했지만 명석한 두뇌로 조선 의학 발전에 기여하게 되는 인물이다.

법정을 무대로 한 제대로 된 ‘명품 드라마’라는 평가를 얻은 SBS ‘신의 저울’의 한장면. 사진제공 SBS
법정을 무대로 한 제대로 된 ‘명품 드라마’라는 평가를 얻은 SBS ‘신의 저울’의 한장면. 사진제공 SBS


그런데 전체 36부작 가운데 16부까지 전개된 내용에 따르면, 팽팽한 긴장감이 유지되어야 하는 주요 등장인물들의 갈등 구도가 힘의 균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유석란과 원장의 지지를 받는 황정에 대한 질투심을 이기지 못한 백도양이 백정이라는 출신 성분을 속이고 있다는 자격지심에 매사 머뭇거리는 황정을 일방적으로 괴롭히는 것이 내용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성균관 유생 신분을 벗어던지고 서양 의학 공부에 뛰어든 명석한 두뇌의 백도양이 '인술(仁術)'을 강조하는 황정과 대비되는 냉정한 의학도로 그려지기보다 질투심에 사로잡힌 성격적 결함이 두드러진 인물로 비쳐지는 것은 '제중원'의 서사 전략이 중심축을 제대로 잡지 못해 발생하는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일본 드라마 '하얀 거탑(白色の塔)'에서 선의의 경쟁자이면서도 상반되는 성격으로 팽팽한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서사의 중심축에 위치했던 인물들이 이기원 작가가 각색한 한국판 '하얀 거탑'에서 힘의 균형을 잃어버렸던 것과 흡사하다.

결과적으로 '최도영(이선균 분)'의 역할이 축소되고 '장준혁(김명민 분)'이 돋보였던 것도 이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도 '하얀 거탑'은 성공을 향한 인간의 욕망을 병원 조직 내의 권력 투쟁 과정 속에 흡착시킴으로써 '장준혁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성공적인 의학드라마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제중원'은 아직까지 그저 개화기의 다양한 볼거리와 자잘한 에피소드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함으로써 격변기의 역동성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홍창욱 PD의 연출력이 아쉬울 따름이다. 홍창욱 PD는 전작 '신의 저울'에서 법 앞에서 누구나 평등함을 강조하고 있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자본과 권력 앞에 나약한 법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성찰한 바 있다.

법의 처벌을 기다리는 입장에서 법 집행자가 된 '장준하(송창의)'와 법 집행자에서 법의 처벌을 받아야 하는 처지로 입장이 바뀐 '김우빈(이상윤)'의 팽팽한 대결 구도를 통해 법정드라마의 진수를 보여주었던 것이다.

설득력 있는 대립구조 형성 필요

만약 '신의 저울'의 연출 감각이 되살아난다면 '제중원'의 후반부는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하지만 시청률이라는 '괴물'에 쫓겨 우왕좌왕하는 듯 구심점 없이 전개되는 사건과 그에 대한 등장인물들의 일관성 없는 태도는 여전히 불안한 시선으로 '제중원'을 바라보게 만든다.

등장인물의 행동이 사건을 만들고 그것이 중심 구조를 이루는 드라마의 특성을 생각할 때 등장인물의 성격 창조는 매우 중요하다. 황정의 안타고니스트(적대자)로서 백도양의 행동이 질투심에서 비롯한 것으로만 비쳐지는 한 '제중원'이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천민과 양반이라는 극단적 출신 성분 차이를 활용한 갈등과 대립 구도는 힘의 균형을 상실하고 있기 때문에 백도양을 매력적인 안타고니스트로 형상화하기 어렵다.

이제 서양 의학을 공부하는 과정에서의 본격적인 대결이 전개되는 지점에서 선의의 경쟁자이면서도 대비되는 성격 때문에 발생하는 갈등과 대립 구도를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래야 황정은 물론 백도양도 매력적인 인물로 거듭 날 수 있다. 천민인 백정과 사대부 자제, 역관의 딸이 서양 의술을 배우면서 진정한 의사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유기적으로 잘 구성해 연출한다면 매력적인 의학드라마가 될 것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피 말리는 시청률 경쟁에서 도태된 드라마들은 극적 맥락을 무시한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상황으로 시청자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유혹에 빠지는 순간, '막장 드라마'라는 오명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에서 방영 내내 일등의 자리를 지켰던 '공부의 신'이 자기변명으로 치장된 승리의 월계관을 쓰고 퇴장한 지금, '제중원'의 행보가 궁금하다.

윤석진 충남대 국문과 교수· 드라마평론가 drama@c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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