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칼럼/하정규]영화 ‘집행자’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19일 17시 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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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집행자\'의 신임 교도관 오재경. 배우 윤계상이 연기했다.
영화 \'집행자\'의 신임 교도관 오재경. 배우 윤계상이 연기했다.

사건만 있고 인물은 없다


영화 '집행자'는 타이밍이 좋았다.

연쇄살인, 아동 성폭행 등 흉악 범죄로 교정과 사형제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은 상황이다. 또 범죄자의 인권이 중시되면서 사회일각에서는 사형폐지론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는 추세다. 특히 사형수의 입장에서 다뤘던 기존의 비슷한 영화들과 달리 사형을 집행해야 하는 교도관의 애환을 다뤘다는 측면에서는 신선한 부분도 있다.

그러나 지나치게 단순한 이분법적 대립구조, 구체성이 결여된 상투적인 인물상, 다채로운 배경설명에 필요한 대사의 결핍으로 인해 영화가 추구했던 리얼리티는 물론 관객들의 큰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12년만의 사형집행 명령

신입 교도관으로 부임한 재경(윤계상 분)은 두 명의 대조적인 선배 교도관을 만나게 된다. 한 명은 재소자들을 가장 거칠게 다루는 교도관 '종호'(조재현)로, 재경에게 재소자들에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그들을 거칠게 다룰 것을 종용한다.

재경은 거친 재소자들 사이에서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한 재소자가 벌이는 인질극의 인질 신세가 되기도 한다. 이때 바로 사형수 성환의 도움으로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는데, 그는 이곳에서 30년을 복역한 사형수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자 모범수이다.

또 다른 선배 교도관인 '김 교위'(박인환)는 이 교도소에서 오래 근무한 사람이다. 푸근하고 따뜻한 성격을 가졌고, 특히 사형수인 성환과는 늘 장기를 두면서 우정을 나누는 친구 사이이다.

때마침 23명의 부녀자를 살해한 연쇄살인범이 교도소로 송치되는데, 종호는 교도관을 비웃고 농락하는 연쇄살인범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무자비하게 매질함으로써 '타고날 때부터 사악한 피를 타고난' 범죄자들은 이렇게 다루어야 함을 재경에게 보여준다.

재경이 종호의 가르침에 따라 재소자들을 거칠게 대하며 교도소의 환경에 적응해 갈 무렵, 잔학한 연쇄살인범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사회각계의 요구에 밀려 12년 만에 이 교도소의 사형수 3명에 대해 형을 집행하라는 법무부의 명령이 내려온다.

본인의 적극적인 고사에도 불구하고 교도소의 유일한 사형집행 유경험자인 '김 교위'는 결국 사형집행에 참가하게 되고, 자신의 오랜 친구인 사형수 성환을 죽여야 하는 처지가 된 현실 앞에 고뇌하게 된다.

교도관들끼리 서로 집행인이 되는 것을 미루다가 결국 제비뽑기를 통해 선발된 재경도 사형집행에 참가하게 되는데, 집행일이 시시각각 다가오면서 교도소의 긴장은 높아져 간다.

죽음과 관련된 3가지 논쟁

인간의 합법적인 죽음과 관련해 오랜 법률적, 윤리적인 논란거리는 '낙태' '안락사' 그리고 '사형폐지' 3가지 문제이다.

이 문제는 사회가 민주화, 선진화되어 감에 따라 더욱 첨예한 사회적 논쟁거리가 된다. 미국에서는 선거 때만 되면 낙태 허용 찬반 여부가 주지사나 대통령의 당락 여부를 좌우할 정도로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다. 최근 미국의 역사적인 의료개혁법안 통과와 관련해서도 직접 관련이 없는 '낙태' 허용 여부가 중요한 관건으로 등장했을 정도다.

최근 우리 대법원의 '존엄사' 인정 판결과 집행을 둘러싼 이슈들을 보더라도 향후 우리사회가 선진화될수록 이런 문제들이 중요한 사회적 논쟁거리가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또 사형문제의 경우에도 사형폐지 여부를 포함해 교정제도 전반을 보다 선진화해야 하는 과제가 앞으로 갈수록 사회문제로 대두될 가능성이 높다. 북유럽이나 뉴질랜드와 같이 놀라울 만큼 민주화된 교정제도를 실현한 국가들에 비해서 아직도 우리의 교정현실은 미흡한 실정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영화가 사형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점은 높은 점수를 줄 만하다. 하지만 단순히 사형문제만이 아니라 교정제도 전반의 문제를 포괄할 수도 있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재소자를 거칠게 다루는 교도관 배종호 역의 조재현
재소자를 거칠게 다루는 교도관 배종호 역의 조재현

사형 집행, 그 현실적 모습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바로 사형 집행의 사실적 묘사 부분이다. 10여 년간 사용되지 않은 교수대를 교도관들이 손보는 장면에서부터 사형이 실제로 일어나는 장면까지 디테일한 묘사는 관객들을 흡인시키는 이 영화의 핵심적 부분이다.

사형집행 전날, 연쇄살인범 용두는 너희들 손에 죽느니 내가 먼저 죽겠다면서 자신의 목을 찔러 혼수상태에 빠지는데, 교도소장은 중태에 빠진 용두를 병원으로 후송하지 않고 어떻게든 내일 사형식장에 갈 수만 있도록 조치하라고 교도소 의사에게 종용한다.

마침내 사형식날, 2명의 사형수의 사형집행은 순조롭게 이루어지지만 마지막 연쇄살인범 용두의 저주와 발악이 이어지면서 서둘러 사형을 마치려하는 교도관들은 뜻밖에도 교수대 장치가 고장 나면서 곤경에 처한다.

결국 교도소장까지 나서서 사형을 집행하려고 동분서주하면서 벌어지는 해프닝과 죽은 것으로 믿는 사형수의 시신이 움직이면서 교도관들이 당황해서 끝까지 죽이려고 애쓰는 장면 등은 독특한 한국식 사형집행의 사실적인 묘사를 보여준다.

전형적인 이분법적 대립 구조

그러나 이 영화의 리얼리티는 여기까지다. 영화의 주요 인물들은 지나치게 전형적인 이분법적인 대립 구도로 인해 리얼리티를 반감시킨다. 즉 교도관의 경우, 비인간적이고 재소자들을 쓰레기로 부르면서 그들에게 군림하려는 '종호'와, 이와 정반대로 사형수와도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지내면서 푸근하면서도 유약해 보이는 '김 교위'가 대비된다.

한편 재소자의 경우, 23명이나 살해하고 교도소에 온 첫날부터 교도관과 사회를 비웃고 스스럼없이 저주를 퍼부어 대는 '타고난 악마'의 모습을 보여주는 '용두'와 젊은 날 한때의 실수로 살인을 저질렀지만 지금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어서 성실하게 살아가는 전형적인 모범수인 '성환'의 모습이 대조적으로 그려진다.

사형 집행 시에도 '성환'은 심지어 "감사하다"고 말하면서 두려움 속에 떨면서도 조용히 죽음을 맞지만, '용두'는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도 사형집행인과 증인들에게 저주와 악담을 퍼부으면서 악마처럼 죽어간다.

주인공인 재경은 이들 대립구도 사이에서 접점의 역할을 담당하지만, 다소 아둔하게 보일 정도로 순진무구해서 이들 사이에서 사실상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방관자에 그칠 뿐이다.

사형수와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는 자상한 교도관 김 교위(박인환 분).
사형수와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는 자상한 교도관 김 교위(박인환 분).

구체적 개인사가 없는 얕은 인물 묘사

이 영화가 관객에게 많은 공감을 주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인물들이 진부하리만치 전형적인데다 구체성마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재경은 고시공부를 포기하고 이제 막 교도관이 된 청년으로 거친 재소자들 속에서 점차 능숙한 교도관으로 변신해 갈 뿐 별다른 개성을 보여주지 못한다. 단지 사형집행이 확정된 상황에서 여자친구의 임신소식을 알게 돼 마음의 갈등을 하고, 결국 여자친구가 이런 그를 믿지 못해 낙태를 결정하게 되는데 이 과정도 관객이 예상할 수 있는 뻔한 스토리여서 감정이입이 안된다.

종호의 경우 과거 재소자에 의해 동료 교도관이 살해당한 것을 계기로 냉혹한 모습으로 변한 것으로 나오는데, 시종일관 변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사형집행을 앞두고 김 교위와의 갈등 속에 결국 연쇄살인범 용두에게 마지막으로 주려던 아이스크림조차 던져 버린다.

김 교위의 경우도 마지못해 사형집행에 참가하지만 시종일관 죄책감과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만 반복될 뿐 그 외의 개인사가 전무하다. 과거에 자신이 사형 집행했던 사형수들을 언급하지만 더 이상의 이야기는 없다.

재소자들의 경우에도 성환은 너무나 착한 모범수, 용두는 극악한 살인범이라는 전형적인 모습 외에, 사형수 성환은 어떤 구체적인 이유로 3명을 살해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떤 계기로 참회하고 기독교에 귀의하게 되었는지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심지어 사형전날까지 열심히 조각에 몰두해있지만 무엇을 조각했는지조차 보여주지 않는다.

연쇄살인범 용두의 경우도 하다못해 어떤 부녀자들을 왜, 어떤 이유로, 어떤 방식으로 죽였는지, 어떤 개인사가 있는지 등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뜬금없이 찾아온 여인이 탄원서를 넣었다고 말하는 장면은 왜 들어가 있는지 도무지 설명조차 없다,

다른 재소자들의 경우는 더욱 심각해서, 그저 마음 약한 교도관은 철저히 무시하고, 강한 교도관에게는 약한 모습을 보일 뿐 누구도 개성이나 사연을 보여주지 않는다.

결국 사형 집행의 대상인 재소자들의 인간적인, 그리고 구체적인 모습의 결핍은 이 영화가 애써 추구하고자 하는 사형의 비극성과 비인간성을 반감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다.

최소한의 설명적 대사의 결핍

이 영화에서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최소한의 설명적인 대사조차도 부족한 점이다. 사실 영화에서 대사의 역할은 단순히 감정이나 의사표현에만 그치지 않는다. 사형이나 교정제도와 관련한 다양한 배경 정보들을 질문과 응답 등의 대화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이런 기회를 전혀 활용하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재경이 다른 선배 교도관들에게 미국에서는 사형방식이 전기의자에서 약물주사 방식으로 변했는데 왜 우리나라는 아직도 교수형 방식을 사용하는지, 또 사형제도가 폐지된 나라도 많은데 왜 우리나라는 아직도 유지할 수밖에 없는지, 하다못해 교수형당한 죄수가 다시 살아난 경우가 있는지 등 다양한 질문들을 던져보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형제도를 둘러싼 다양한 모습과 찬반 논쟁까지 끌어낼 수 있는데 이런 기회를 전혀 활용하고 있지 않다.

또한 여러 재소자들과 교도관과의 대화를 통해서 교도소내의 분위기나 여러 소문이나, 각 재소자의 특성, 교도관의 개인사 등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는 점도 이 영화는 간과하고 있다. 이런 대화들을 통해 재소자들과 교도관들의 감추어진 개인사나 개성이 드러나고 이것이 다시 관객들의 이해를 도움과 더불어 부족한 공감대를 채워갈 수 있는데도 말이다.

결국 재소자나 교도관과의 대화 또는 교도관들간의 대화는 이야기 전개에 필수적이거나 다소 억지스러운 크고 작은 갈등들로만 채워져 있거나, 교도관들도 자조적인 모습, 즉 공부를 못해서 교도관이 되었다거나, 7만원 수당을 받고 망나니가 되었다는 등의 탄식으로만 채워져 있다.

“X나게 열심히 했는데…”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하는 점은 요즘 영화에서 너무나 남발되고 있는 욕과 육두문자의 문제이다. 이 영화가 교도소의 현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불가피한 면도 있겠지만 오히려 삶과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 앞에서 육두문자로 대사를 채우는 것은 영화의 격조를 스스로 떨어뜨리는 격이 돼버렸다. 보다 절제미 넘치면서도 무게 있는 대사는 불가능했던 걸까.

사형집행이 끝나자 죄책감과 정신적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김 교위는 정년까지 남은 일년을 끝내 채우지 못하고 사표를 내게 되고, 냉혈한이었던 종호마저 정신적 트라우마에 빠져 환청을 들으며 이미 죽은 사형수들이 살아있다고 소동을 피우다 병원으로 후송된다.

동네 선술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는 주인공 재경이 왜 교도관들만 피해자가 되어야 하는지를 절규하며 던지는 마지막 대사는 뜬금없으면서도 우스꽝스럽기조차 하다.

"X나게 열심히 했는데 왜 X랄이냐고요!!"

하정규 한국 EFT코칭센터 소장 ckha9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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