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심영섭의 '부산영화제 체험기'

  • 입력 2002년 11월 6일 19시 18분



《부산의 가을은 영화와 함께 깊어간다. 올해도 변함없이 14∼23일 제7회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려 전국의 영화 청년들을 불러 모은다. 부산 영화제의 무엇이 이토록 영화팬들로 하여금 열병을 앓게 하는 것일까. 2회 때부터 매번 부산영화제에 참여했던 영화평론가 심영섭씨로부터 ‘부산영화제 체험기’를 듣는다.》

마치 공유할 수 없는 죽음의 운명성처럼, 내게 영화는 함께 보아도 다 각자 보는 행사였다. 영화에 ‘미친’ 한 후배는 심지어 극장 안에서만은 누구와 함께 앉거나 팝콘을 먹는 것조차 거부했는데, 그때만큼은 평소 구부정하던 그 아이의 등도 빳빳하게 서서, 스스로가 스스로를 떠받치고 있었다.

부산 영화제에서 난 철저하게 거꾸로 돌아다닌다. 영화평론가라는 업(業)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웬만한 영화는 공짜로 보는 횡재를 하지만, 일단 입소문이 나서 표를 구하기 힘든 작품일수록 대부분 그냥 지나친다. 바람을 크게 탄 영화일수록 거품은 컸고 극장내 게스트석은 대부분 아는 사람들로 채워지기 때문에 마치 노천 변에서 치러지는 동네 행사에 참석한 느낌을 받곤 했다. 또 그런 영화일수록 전국 개봉을 앞둔 덩치 큰 것들이 대부분인데, 나중에 보아도 그만이었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하나비’ ‘4월 이야기’ 등 일본 영화 개방 금지라는 족쇄에 묶이는 바람에 오히려 거품이 컸던 영화들은 허상의 너울로 나를 미혹했다. 그런 영화들을 영화제에서 보는 건 마치 화장발이 억센 여자와 잔 뒤 아침에 깨어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부산영화제에서 나는 늘 진수성찬의 식탁만 받는 임금이 된다. 마음먹으면 하루에 서너편을 폭식해도 되고 그것들을 안주삼아 지인들과 바닷가의 횟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품평회를 열기도 한다.

그러나 ‘그 어떤 영화’를 만나면 난 그럴 수가 없다. 마음은 정처없이 해변의 바람을 거슬러 떠돌아다니고 영화에 내 준 몸은 내가 어디 있는지를 잊게 한다.

비디오로 눌린 듯한 화면이 아니라 필름으로 영접한 ‘아비정전’을 보았을 때. 청자의 어두움과 에메랄드의 투명함이 서로 몸을 섞은 고단한 빛깔의 녹색 위로 발 없는 새가 날고, 장궈룽은 러닝 셔츠 한 장만 입고 거울 앞에서 혼자 맘보춤을 추었다. 그후 난 가끔 도시의 하늘을 가르는 발 없는 새를 보곤 한다. 후샤오셴의 ‘동년왕사’가 주었던 슬픔, 서구 영화와의 속도전을 완벽히 거절한 작가는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주인공들의 영혼을 말없이 길어 올리고 있었다.

이런 영화를 보다가 다시 축제처럼 흥겨워지고 싶을 때면 하루에 한 편은 코미디나 뮤지컬, 애니메이션을 맞이하며 관객들과 어깨 춤을 추었다.

문득 여성 감독 클라라 로를 광복동 길거리에서 마주쳤던 기억이 난다. 그녀는 남자 친구와 손잡고 걷고 있었는데 둘은 마치 한 쌍의 비둘기 같았다. 이전에 여성 감독과의 모임에서 한 무더기의 감독들과 만났던 터였는데도, 지금도 내 기억에는 하늘이 한없이 넓었던 ‘1967년 시트로앵’의 화면과 평온하면서도 진정성을 가진 인간 관계를 살짝 보여주었던 그녀가 겹쳐져 기억되고 있다. 클라라 로를 보고, 빔 벤더스와 함께 빔 벤더스의 ‘밀리언 달러 호텔’을 보는 것. 그것도 부산만이 내게 준 선물이다.

아마도 중요한 것은 하루에 본 영화 편수도, 부산이 틀어 주는 영화의 편수도 아닐 것이다. 유럽이든 아시아이든 코미디든 판타스틱이든 영화제의 본질은 제각각 원하는 주제의, 보고 싶은 영화를 틀고, 보고 싶은 영화를 보면 되니까.

그러니 올해 부산에서 기타노 다케시나 차이밍량 감독을 만나더라도 놀라지 마시라.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이 하나되는 것이 또한 영화제니까. 부산에서 나는 부산의 늦가을과 바다와 영화 한 편만으로도 족할 것이다. 마치 그 누군가를 만나 행복했듯 그 수많은 영화들 중 나를 사로잡는 영화 한 편만을 만난다 해도 말이다.

순결했던 영화 청년들의 밤이, 하늘이 한 뼘 더 낮아지고 바다는 한 뼘 더 좁아지게 만들던 그 많던 아이들이 이제 부산의 해변으로 다시 몰려 올 것이다. 부산을 진정 가을의 초입부터 겨울까지 내내 ‘영화제’로 남게 만드는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쉬리나 송어의 밤 등 웬 물고기의 밤이 그렇게 많았는지, 술을 물처럼 들이켜다 학생들이 선물로 준 지갑을 잃어버린 채 바닷가에 앉아 엉엉 운 그 밤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작년 이맘 때, 아이를 가지는 바람에 포장마차에서 우연히 만난 우리의 호호 할아버지 김동호 위원장의 술을 끝내 받아 마시지 못한 한도 이번에는 확 풀어 버리리라. 반바지에 휘파람 휘휘 불며 슬리퍼 끌고, 주머니에 손 넣고 동네 산책하듯 그렇게 가자. 아마도 부산영화제의 가장 좋은 관람법은 기억의 책갈피에 부산을 끼워 넣을 수 있도록 지금부터 한껏 들뜨는 일은 아니던가 싶다.chinablue9@hanmail.net

▼예매는 충전식 전자화폐 '피프캐시'로▼

개막을 불과 1주일 앞둔 부산영화제. 허탕치지 않으려면 예매도 서둘러야 한다. 인터넷 예매가 4일부터 시작돼, 개막과 폐막작은 매진됐고 나머지 영화들의 입장권은 절반 가량 남아 있다.

예매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올해부터 ‘피프캐시’라는 네트워크 가상화폐가 사용된다. 신용카드 결제의 처리 지연과 예매 확인 불가 등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도입된 충전식 전자화폐다.

부산국제영화제(www.piff.org)나 부산은행(www.pusanbank.co.kr)홈페이지에 들어가 회원가입신청을 하면 피프캐시 계좌번호를 받을 수 있으며 이 번호로 입금한 뒤 사용하면 된다. 일반 상영작들은 피프캐시, 부산은행 전 영업점 창구와 서울 코엑스 메가박스, 폰 뱅킹, 각 은행 현금지급기 등을 통해 예매가 가능하다. 영화제 시작 전에는 부산은행 전 지점에서 수수료 없이 입장권 환불이 가능하며, 영화제 기간 중에는 상영 하루 전까지 임시매표소에서 환불이 가능하나 수수료 20%가 붙는다. 당일 상영 입장권과 폰뱅킹으로 예매한 입장권은 취소 및 환불이 불가능하다. 인터넷이나 폰뱅킹, 현금지급기로 예매한 관객들은 신분증을 갖고 상영 1시간 전까지 임시매표소에 와서 입장권을 받아야 한다.

일반 상영작 입장권은 5000원. 올해부터 모든 상영관의 맨앞 두 열에는 30%의 할인 혜택이 주어진다. 할인좌석은 상영 당일 현장에서만 판매한다. 잔여좌석 확인, 상영작 안내는 부산국제영화제 홈페이지(www.piff.org). 051-747-3010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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