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뷰]'생활의 발견' 욕망 좇아 떠난 로맨스 여행

  • 입력 2002년 3월 18일 18시 39분


홍상수 감독에겐 뭔가 특별한 ‘맛’이 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원도의 힘’ ‘오! 수정’ 등 그의 작품들은 ‘영화적’이지 않다. 극적인 사건과 감미로운 음악, 현란한 화면 등 관객의 감정을 자극하는 ‘과장의 감미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들은 씹으면 씹을수록, 질리지 않는 묘한 맛을 느끼게 하는 ‘건빵’ 맛이 난다.

그의 신작 ‘생활의 발견’도 특유의 ‘건빵’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이전 작품들보다 더 심심해졌다. 그래도 ‘돼지…’ ‘강원도…’에서는 죽음과 살인 같은 ‘사건’이 있었고 ‘오! 수정’에서는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기억에 대한 유머와 정교하게 계산된 구성의 미학이 있었다.

영화 상세정보 보기
예고편 보기

‘생활…’은 약간 얼굴이 알려진 연극배우 경수(김상경)가 6박7일간 여행하면서 겪는 짧은 로맨스를 그렸다. 경수는 여행 길에서 푼수끼 많은 무용가 명숙(예지원)과 교수 남편을 둔 유부녀 선영(추상미)과 차례로 만나 섹스를 나눈다.

좀 거칠게 말할까? 이 작품의 주요 장면은 낯선 곳을 찾아 ‘썸싱’을 기대하는 한 남자의 여자 ‘꼬시기’이자 섹스를 매개로 스쳐 지나가는 한 남자와 두 여자의 ‘오버랩’이다.

경수는 영화 출연이 좌절되자 기분 전환을 위해 춘천에 사는 선배를 찾아간다. 경수는 명숙이 자신에게 끌리자 선배가 그녀를 좋아하는 걸 알면서도 섹스를 한다. 하룻밤 사랑을 뒤로 한 채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은 경수는 기차 안에서 만난 선영에게 반해 경주에서 내려 선영의 주변을 맴돌다 결국 몸을 섞는다.

홍 감독의 이전 영화들처럼 ‘생활…’의 등장 인물들은 사랑한다고 주장하며 섹스를 나누지만 그 장면조차 생활처럼 건조하다. 사랑과 섹스는 일종의 관찰을 위한 소재이지 관객의 감정을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 수정’이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을 매개로 인간이란 존재의 부정확한 기억을 다뤘다면 ‘생활…’은 무의식중에 반복되는 인간의 모방 행위에 초점을 맞췄다.

이를 위해 영화는 곳곳에 계산된 대사와 장면을 자주 보여준다. 경수가 만난 두 여자는 한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섹스 뒤 ‘내안의 당신, 당신 안의 나’라는 비슷한 글을 남긴다.

그런가 하면 경수는 “사람처럼 살긴 어렵지만 괴물은 되지 말자”는 영화제작자의 말을 흉내내 다른 상황에서 사용하곤 한다. 한마디로 이 영화의 러닝 타임 2시간은 완전히 홍상수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홍상수의 ‘힘’이나 객석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원인이기도 하다. 22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김갑식기자 gskim@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