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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0년 10월 11일 18시 4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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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도심 그것도, 서울 덕수궁과 광화문 일대에서 ‘낮 문화’가 꿈틀거리고 있다. 정장으로 빼 입은 사람이 많은 서초동(예술의 전당)이나 젊음으로 윤색된 대학로와는 풍경이 다르다. 어떤 일이 벌어질까.
◇정오의 재즈
고풍스러운 건물과 키다리 나무가 줄지어 선 서울 정동. ‘Days Of Wine And Roses’ ‘All Of Me’…. 흐느끼는 듯 끈적한 재즈 보컬이 가슴과 다리를 한꺼번에 끌어당긴다. 낮 12시반 정동극장의 쌈지마당에 마련된 야외무대에는 80여명의 ‘낮 손님’이 몰려 있다. 20일까지 각종 장르의 하이라이트를 뷔페식으로 선보이는 ‘직장인을 위한 정오의 예술 무대’ 시리즈의 재즈 편.
서소문동 직장에 근무하는 김성준씨(29)는 “재즈가 좋아 점심은 김밥으로 때우고 공연장을 찾았다”면서 “재즈는 와인 한잔이 놓인 한밤이 제격이지만 낮 공연도 이상스럽게 어색하지 않다”고 말했다.
삼삼오오, 또는 한 직장에서 단체로 며칠째 ‘문화 소풍’을 나오는 팀도 있다. 서소문 국민카드 고객개발실 직원들이 차지한 돌 탁자에는 아예 햄버거 김밥 콜라로 ‘점심 상’이 차려져 있다. 회사 동료 13명과 함께 단체관람한 윤현정씨(26)는 “세종문화회관 분수대의 야외무대에서 열리는 ‘뜨락 축제’도 자주 이용한다”며 “음식의 열량은 줄이고, ‘문화 열량’은 높일 수 있는 낮 시간의 문화 나들이는 언제나 즐겁다”고 말했다.
낮 12시에서 1시간 남짓인 직장인의 점심시간에 맞춘 공연이어서 색다른 몸짓이 많다. 12시54분경. 넥타이 차림의 와이셔츠 맨들은 수시로 시계를 들여다본다. 여기저기서 휴대전화가 ‘신음’을 토해낸다. 일터로 갈 시간이다.
◇Mr & Miss 덕수궁
정동극장이 6년째, 세종문화회관이 82년부터 진행 중인 낮 공연은 젊은 샐러리맨의 감성 변화와 어우러져 이들의 문화 사이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덕수궁 입구 제일화재에 근무하는 27세 동갑내기 사원 박동현(주식운용부) 정민아씨(인사총무부)를 공연장에서 만났다.
이들은 오전 8시25분경 “하나 둘 셋…”하는 사내 스피커의 구령에 맞춰 국민체조에 이어 사가 제창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퇴근 후에는 20대 후반 다른 직장인과 다를 게 없지만 점심시간의 ‘시(時) 테크’는 확실히 다르다.
“전날 음주량에 따라 덕수궁 근처에 근무하는 직장인들, ‘덕수궁족’이 점심 시간에 출몰하는 장소는 달라진다. 하지만 컨디션이 좋으면 익숙해진 세종문화회관이나 정동극장의 낮 공연을 찾는 동료들이 많다.”(Mr. 덕수궁)
김밥이나 햄버거 등으로 간단히 끼니와 커피 등을 ‘테이크 아웃(Take Out)’한 뒤 낮 시간 무료로 개방되는 덕수궁이나 공연장에서 짧게 문화를 향유하는 것.
문화예술전문사이트인 ‘infoart.com’이 5월 네티즌 1254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가를 어떻게 보내는가’라는 설문조사에서는 영화와 공연관람이 34%로 가장 높았다. ‘TV 시청, 라디오 청취’와 ‘웹서핑’이 각각 17%와 15%로 2, 3위를 차지했다. 이어 외식(10%) 여행(7%) 쇼핑(5%) 운동(4%)의 순이었다.
‘렌트’ ‘듀엣’ 등 작품 이름을 꼽으며 ‘뮤지컬광’을 자처하는 ‘Miss 덕’은 “다이어트를 하면서 자투리 시간을 알뜰하게 쓰기 위해 점심 시간은 20분을 넘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두사람의 한달 문화비는 월급의 10% 안팎.
◇3다(多) 3소(小)
“회사 인터넷 게시판에 썰렁하게 경제가 어쩌구, 정치가 저쩌구 떠들면 그냥 ‘왕따’ 당해요. 최근에는 김희선 홍석천 송영창과 관련된 글이 많았습니다.”(Mr. 덕)
정치 이야기와 밥, 술의 양은 갈수록 줄어든다. 대신 공연 관람과 연예정보, ‘아이 러브 스쿨’같은 새로운 모임 참여가 늘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길 건너편 북창동은 점심 때나 비빔밥 먹으러 간다”는 ‘Mr. 덕’의 주장에 ‘Miss 덕’은 “밤에도 ‘N분의 1’로 가끔 가는 것 아니냐”며 톡 쏘아댄다.
대중문화평론가 김지룡씨는 “특정분야의 마니아를 존경하는 게 요즘 젊은 세대의 마인드”라면서 “이를 반영하듯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샐러리맨들은 직장이라는 틀이 강하게 옭아매지만 끊임없이 문화적 욕구를 발산한다”고 말했다.
<김갑식기자>gs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