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리더십에 목마른 시대…그래서 왕건에 빠진다

  • 입력 2000년 9월 18일 19시 09분


○…요즘 리더십의 화두는 단연 왕건(王建)이다. 한 밀레니엄 전의 인물인 고려태조 왕건이 왜 부각되고 있을까. KBS 1TV 드라마 '왕건' 탓도 있지만 어지러운 시대, 진정한 리더를 기다리는 기대심리가 투영돼 있을 법도 하다. 삼성전자리더십개발센터장 김석우박사(경영학) 동아일보 문화부 허엽(방송담당) 이광표(출판) 김형찬기자(학술·철학박사)가 이 주제를 집중 분석했다.

허엽〓드라마 ‘태조 왕건’이 30%대 시청률을 보이며 인기 드라마로 자리잡고 있다. 한 변호사는 “뉴스 밖에는 보지 않다가 최근 들어 왕건은 꼭 보고 있다”면서 주변에 궁예나 왕건의 말투를 흉내내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리더로서 궁예와 왕건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김석우〓궁예의 리더십은 카리스마형이고 왕건은 변화유도형(Transformational)이다. 둘의 차이는 휘하에 권한을 주느냐(Empower)는 것이다. 카리스마형은 ‘나를 따르라’ 식으로 군림하나 변화유도형은 변화에 대한 열정으로 비전을 제시하되 아랫 사람들을 믿고 맡긴다. 드라마상에서 아직 왕건이 흔히 생각하는 리더의 모습은 아닐지 모르지만 변화유도형의 전형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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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수종이 말하는 왕건은?

김형찬〓궁예는 신라 왕족이라고 하지만 ‘맨땅’에서 일어난 선동가 스타일이고 왕건은 선대부터 권력과 재력의 기반이 탄탄해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일단 세력이 커진 뒤에는 왕건처럼 실무와 전략을 겸비한 리더의 능력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특히 왕건의 집안은 오래전부터 여러 지역 사람들과 거래해 오면서 기브앤테이크라는 건전한 장사꾼의 협상과 타협의 기술을 체득해왔다.

이광표〓‘슬픈 궁예’ ‘태조왕건’ 등의 책으로 보면 왕건의 큰 덕목은 인내와 솔직함이다. 궁예처럼 자수성가형은 성격이 과격하고 급한 반면 왕건은 큰 일을 위해 기다릴 줄 알았다. 왕건이 금성(지금의 나주)를 칠 때 유장자한테 솔직하게 도움을 청하는 대목에서 그의 여유를 느낄 수 있다.

허엽〓‘리더십’이라는 책에서는 리더를 전략가형 인적자원형 전문가형 혁신형 규제형으로 나눈다. 궁예는 혁신형, 왕건은 전략가형이다. 완벽한 리더는 이 모든 요소를 겸비한 이들이 아닐까.

김석우〓리더십에 대한 정의는 리더십을 연구하는 학자수만큼 있다. 리더의 어원은 참다 인내하다 고통받다 등이다. 리더십의 십(Ship)도 한배를 탔다는 뜻이다. 즉 리더는 고독한 결단을 내려야 하고 부하들에게 믿음과 신뢰를 주는 선장이어야 한다. 훌륭한 리더란 ‘4E’로 집약된다. 인비전(Envision), 인에이블(Enable), 에너자이저(Energizer), 임파워먼트(Empowerment)다. 이중 위대한 리더들 사이의 가장 큰 차이는 임파워먼트다. 아랫사람들에게 권한을 주는 것이다. 칭기즈칸은 영토를 벗어난 적이 한번 밖에 없다. 광대한 몽골제국을 건설하면서 부하 장수들을 믿고 맡겼다.

김형찬〓유가는 덕장을 내세운다. 법가는 영웅보다 사회적 시스템을 완비하는데 초점을 맞춘다. 시스템이 완비되면 리더에 기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유사 이래 시스템만으로 성공한 사회는 하나도 없다. 그런 점에서 리더의 출현이 기다려진다.

김석우〓리더십은 또 감동이다. 1주일에 한번씩 부하 직원들에게 감동을 주지 않으면 리더의 자격이 없다.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와인버거는 리더십은 항상 흥미를 불러 일으키고 늘 상대를 배려해야 한다는 점에서 섹스와 같다고 했다.

허엽〓훌륭한 리더는 부하들을 스스로 일하는 ‘셀프 리더’로 유도한다. 리더의 배려나 기다림 등은 그런 점에서 중요하다. 또 선택의 딜레마에서 리더의 의사결정이 모호하면 신뢰를 잃어버린다.

이광표〓리더의 상에 관한 일본의 고사를 새겨볼 만하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두견새가 안울면 목을 쳤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울 때까지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도쿠카와 이에야쓰(德川家康)는 울 때까지 기다린다. 이중 최후의 승자는 기다렸던 도쿠카와였다. 물론 야망을 갖고 준비한 자만이 기다릴 줄 안다.

김석우〓타임지는 미국 제너럴일렉트릭사 최고경영자인 잭 웰치를 새 리더상으로 부각했다. 웰치는 “21세기는 새로운 유목사회이며 나는 칭기즈칸을 닮겠다”며 칭기즈칸의 미덕을 단순 신속 자신감으로 분석했다.

김형찬〓항우가 유방보다 더 능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유방이 이겼다. 이유는 덕이다. 성공한 사람들 밑에는 술수를 쓰면서 욕을 대신 먹어주는 부하가 있다. 유비처럼 자기 능력 이상으로 사람을 끌어 모을 수 있어야 한다.

이광표〓그러나 왕건이 자기 여자(연화)를 궁예에게 빼앗기는데도 참는 것은 너무 비정하다. 야망을 가진 2인자로서의 불가피한 선택이었겠지만.

김형찬〓1인자가 못됐던 항우라면 난리를 쳤을 것이다. 그러나 왕건은 이미 홀몸이 아니었다. 여자보다 송악을 지켜야 했다. 그는 고독한 결단을 내린 셈이다. 그러나 왕건과 궁예에 대한 평가는 결과가 드러난 역사이자 승자의 기록만으로 판단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허엽〓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강한 카리스마를 풍겼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도 외견상 리더십 스타일이 거의 다르다.

김석우〓김위원장은 카리스마형이다. 비전과 에너지도 있지만 권한을 넘겨주지 않는다. 이는 리더가 없을 때 위기 상황이 닥칠 수도 있다. 역대 대통령의 리더십 스타일은 고위 관료를 지낸 이가 그들의 결재 방식을 각각 네자로 함축해 비교한 적이 있다. 그에 따르면 ‘시원시원’(박정희) ‘두고가요’(최규하) ‘꼬치꼬치’(전두환) ‘알았어요’(노태우) ‘사인부터’(김영삼)였다.

<정리〓허엽기자>he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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