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년작 「심청전」]현존 해방전 영화중 유일한 민족극

  • 입력 1997년 12월 26일 08시 12분


1919년 한국의 첫 영화 「의리적 구투」(義理的 仇鬪·영화 연극 혼합극)가 상영된 후 해방전까지의 우리 영화사는 「구전(口傳)영화사」에 머무르고 있다. 감상한 이는 있어도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당시 제작된 극영화 가운데 남아있는 것은 한국영상자료원이 일본에서 복사해온 「망루의 결사대」 「젊은 그들」 「사랑의 맹서」 등 세 작품뿐이다. 이들은 전부 친일색채를 띤 「어용영화」여서 영상자료원측은 일반에 공개한 적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에 모스크바에서 발견된 「심청전」은 민족적인 소재를 다룬 해방전 영화 가운데 소재지가 확인된 유일한 작품이다. 「심청전」은 62년 도금봉 최은희가 출연한 작품 등 지금까지 3차례 영화화되었다. 첫 작품은 1925년 윤백남감독이 나운규 주연으로 제작한 무성 「심청전」. 그러나 짧은 제작기간 때문에 졸작이 되자 『언젠가는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결국 37년 안석영감독이 리바이벌 제작했다. 신극단체인 「토월회」 회원이었던 안석영감독(본명 안석주·安碩柱)은 화가 시나리오작가 배우를 겸하고 있었으며 심청역의 김소영은 당대 최고의 무용가였던 조태원의 부인으로 일급 배우였다. 이외에도 악역 전문인 석금성(뺑덕어멈 역), 연기력 탄탄한 조연전문 김신재(장승상부인 역) 모두 당대의 대표적 배우다. 당시 「심청전」 제작을 알리는 동아일보 기사는 『최초의 영화배급기관 기신양행(紀新洋行)이 처음으로 제작하는 조선영화로 양행 대표인 원로 이세기씨가 시나리오를 개작각색했으며 획기적 비용으로 가장 완비된 촬영 녹음수준을 갖춘 조선정조 넘치는 작품』이라고 쓰고있다. 이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했던 원로배우 전택이(田澤二·86)옹은 『「심청전」은 개봉관인 단성사와 지방 모두 큰 성공을 거뒀다』며 『우리 고전을 영화화한다는 데에 고무돼 모두들 열성적으로 참여했다』고 회고했다.「심청전」은 38년 하와이로 수출되는 개가를 올렸으며 같은 해 최초의 「조선영화제」에서 역대 영화 가운데 관객인기투표 1위에 올라 명실공히 당시 「최고의 작품」임을 입증했다. 〈권기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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