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경제 급소 찌른 ‘오일패닉’… 제조업 멈추고 포장재도 말라가

  • 동아일보

[에너지-공급망 ‘트윈 쇼크’] 원유→나프타→기초소재 고리 흔들려
조선업 등 동시다발적 소재 수급난… 화장품-식음료 업계선 용기부족 사태
“중동산 원자재 당장 대체 어려워… 석유 얽힌 업종, 길어야 한달 버텨”

나프타 부족에 도시락 용기 업체까지 비상
27일 오전 경기 광주시의 한 플라스틱 제조 공장 내 사출기에서 도시락 용기 뚜껑이 제작돼 나오고 있다. 최근 중동 전쟁으로 석유화학 제품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 공급에 차질이 발생하면서 이 공장은 제품 생산량을 줄여야 할 위기에 처했다. 광주=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나프타 부족에 도시락 용기 업체까지 비상 27일 오전 경기 광주시의 한 플라스틱 제조 공장 내 사출기에서 도시락 용기 뚜껑이 제작돼 나오고 있다. 최근 중동 전쟁으로 석유화학 제품의 핵심 원료인 나프타 공급에 차질이 발생하면서 이 공장은 제품 생산량을 줄여야 할 위기에 처했다. 광주=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로 촉발된 에너지 수급 불안이 한국 경제의 급소를 겨누면서 충격이 확산하고 있다.

중동 바닷길이 막히자 단순한 물류 지연이나 가격 상승을 넘어, 석유화학 원료 및 기초 소재 생산이 멈추고 국내 유통부터 수출까지 연쇄 차질을 빚는 등 에너지-공급망 ‘트윈 쇼크’ 우려가 현실화하는 모습이다. 수입처 다변화와 비축유 확대, 기저발전 활용 등의 중단기 대응을 모색해야겠지만, 자원 빈국이자 대외 의존도가 높은 동아시아 공업 국가인 한국이 내놓을 수 있는 대책이 제한적이라는 점은 근본적인 한계다.

● 에너지발(發) 리스크에 산업계 ‘전방위 타격’

국내 산업계는 이란 전쟁 이후 원유 수급 차질이 발생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산업 전반의 공급망이 붕괴할 위기에 처했다. 정유·석유화학을 시작으로 조선, 철강, 건설, 바이오, 화장품, 농업까지 연쇄 타격을 받고 있다. 어떤 분야의 산업이든 석유화학 제품이 필수적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동시다발적인 소재 수급난이 실물 경제의 숨통을 조이는 형국이다.

국내 최대 나프타분해시설(NCC)인 여천NCC의 ‘불가항력(Force Majeure)’ 선언은 연쇄 충격의 시작이 됐다. 여천NCC는 4일 고객사에 서한을 보내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원료 나프타 수급에 문제가 생겼고, 모든 생산 시설을 최소한의 용량으로 운영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불가항력이란 전쟁 등 예측 불가의 외부 변수로 계약 이행이 불가능해진 경우 공급 불이행에 따른 배상 책임을 면제받을 수 있는 조항이다.

화학 산업은 ‘원유→나프타→화학 기초소재→전방산업’으로 이어지는 연결고리가 핵심이다. 이 고리가 흔들리자 제조업 전반이 동시다발적 타격을 받았다. 조선업계는 나프타를 기반으로 만드는 철판 절단 가스 재고가 떨어져 협회 차원에서 정부에 지원을 요청했다. 철강업계는 그에 따른 조선소의 후판 수요 감소를 우려하고 있다.

화장품과 식음료 업계는 플라스틱 용기 등 포장재 수급 불안이 커져 제품을 내놓지 못할 위기에 처했다. 경기 수원시에서 업체 100여 곳에 플라스틱 용기를 납품하는 한 유통업체는 “공장에서 원료가 없어 생산 자체가 안 되다 보니 매입 물량이 평소 절반 수준으로 줄었다”며 “들어오는 즉시 바로 거래처로 나가는 ‘제로(0) 재고’ 상태이고, 가격도 최소 15∼20%는 오르는 게 불가피한 구조”라고 덧붙였다. 한국프라스틱공업협동조합연합회에 따르면 합성수지 등 석화업체로부터 공급받던 원료비는 전쟁 3주 만에 50% 넘게 뛰었다.

건설업은 공사비와 운송비 상승으로 부담이 커졌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에 따르면 국제유가가 50% 오를 경우 건설업 전체 생산비용은 1.06% 증가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 ‘유럽행 지름길’ 홍해 봉쇄 시 수출 타격 불가피

설상가상으로 중동 전쟁 전선이 호르무즈 해협을 넘어 홍해로까지 확대될 조짐을 보인다. 예멘의 친이란 반군 후티가 참전을 공식화하면서 홍해와 지중해(유럽)를 잇는 수에즈 운하마저 봉쇄될 위기에 처한 것이다. 석유 핵심 항로인 호르무즈 해협에 더해, 수에즈 운하를 지나 유럽으로 통하는 물류 지름길까지 막힐 경우 해상 운임이 급등한다. 대외 의존도가 높으면서 수출입 화물의 99% 이상을 선박으로 운송하는 한국은 경제에 막대한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중동 사태가 길어질수록 국내 수출기업들의 선박 확보가 어려워지고 운임과 보험료 부담도 커진다. 비축해 둔 재고도 한두 달 치밖에 없어 당장 ‘4월 위기설’이 현실화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국내 한 대기업 임원은 “중동산 원자재를 대체하는 것은 단기적으로 불가능하다”며 “업종을 가리지 않고 석유 관련 공급망에 얽힌 곳들은 앞으로 길어야 한 달 버틸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정형곤 대외경제정책연구원(KIEP) 선임연구위원은 ‘보이지 않는 공급망 위기: 한국 공급망의 착시와 조기경보’ 보고서를 통해 “공급망의 구조적 위험을 방치할 경우 다음 충격은 더 큰 위험으로 이어질 것”이라며 “공급처 다변화, 기술 대체, 전략적 비축 등 구조 개선 정책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석유·가스 중심의 에너지 구조와 특정 해상 경로 의존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유사한 위기는 반복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현대 산업의 근간이 석유라는 게 이번 중동 사태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 만큼, 석유 대체 원료를 모색하는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정부로서는 단순히 기름값 안정을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 산업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에너지 안보에 사활을 걸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편 중동 확전 공포는 아시아 주요 증시를 일제히 끌어내렸다. 30일 코스피는 전 거래일 대비 2.97% 하락한 5,277.3으로 마감했다. 일본 닛케이평균주가(―2.79%), 대만 자취안지수(―1.80%) 등도 동반 약세를 보였다.

#중동발 지정학 리스크#에너지 수급 불안#석유화학 원료#공급망 차질#나프타분해시설#호르무즈 해협 봉쇄#산업 공급망 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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