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개혁 수용한 현대車, 단기수익 노린 헤지펀드 공격에 타격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5월 22일 03시 00분


코멘트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안 보류


현대자동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안 잠정 중단은 한국식 정부 주도 기업 지배구조 개선이 엘리엇 같은 단기수익을 노리는 외국계 헤지펀드에 발목을 잡혔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후유증이 예상된다.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은 순환출자 해소, 일감 몰아주기 방지 등 정부의 대기업 개혁을 수용하면서 미래를 개척하려는 측면이 컸다.

한 재계 관계자는 “주요 대기업 지분 절반가량이 외국인 주주인 상황에서 한국식 기업 개혁의 특수성이 통하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가 됐다”고 평가했다. 앞으로 정부가 기업 지배구조 개편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기 위해서는 금산분리 완화 등 제도적 뒷받침이 필수적이라는 목소리가 나오는 이유다.

○ 엘리엇 압박, 국민연금 트라우마 결정타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안이 난관에 봉착한 것은 4월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엘리엇은 모비스 분할과 글로비스 합병 비율에 의문을 제기하며 자신들이 직접 만든 지배구조 개편안을 제안했다. 현대모비스와 현대차를 합병한 뒤 인적분할해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라는 안이었다. 이는 비금융지주사가 현대카드와 현대캐피탈 등 금융계열사 지분을 보유하게 돼 금산분리에 위배된다. 실현할 수 없는 안이다.

단기 수익을 노린 엘리엇의 억지 공격으로 본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를 중심으로 한 지배구조 개편안을 흔들림 없이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달 15일 세계 2위 의결권 자문사 글래스루이스에 이어 같은 날 세계 최대 자문사인 ISS까지 반대 권고안을 발표하면서 상황이 복잡해졌다. 해외 기관투자가는 의결권 자문사 의견에 따르는 경향이 높은데, 현대모비스의 외국인 주주 지분은 약 48.6%다. 17일 2대 주주로 지배구조 개편안 통과의 열쇠를 쥔 국민연금(9.8% 보유)의 의결권 자문에 응하는 한국기업지배구조원까지 반대에 나선 것은 결정타였다.

재계 관계자는 “2015년 의결권 자문사들의 반대 권고에도 국민연금이 찬성한 뒤 법적 논란에 휩싸였던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사례를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국민연금이 반대하면 주총 통과가 어렵고, 국민연금이 찬성해도 추후 법적, 정치적 논란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 것”이라고 분석했다.

결국 시장의 반대에 맞서 무리하게 개편안을 추진할 필요는 없다는 최고위 경영진의 유연한 판단이 주총 취소로 이어졌다. 현대차 관계자는 “시장의 의견을 존중하자는 취지”라고 말했다.

○ 재벌개혁 주도하던 공정위 체면 구겨

관가 안팎에서는 현대차그룹의 개편안 철회가 공정거래위원회에 ‘뼈아픈 결과’라는 분석이 많다. 그동안 공정위는 현대차그룹이 지배구조개편을 선도하면 다른 대기업집단도 변화에 동참할 것으로 기대해 왔기 때문이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취임 후 줄곧 재벌의 경제력 남용을 방지하기 위해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지배구조 개편을 요구해 왔다. 김 위원장은 지난해 8월 외신 인터뷰에서 “현대차그룹 순환출자 구조 해소에 대해 현대차와 논의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현대차그룹의 개편안은 실제로 정부와의 교감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김 위원장은 3월 현대차그룹 개편안 발표 이후 “시장의 요구에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밝혔다. 이례적으로 개별 기업의 지배구조 개편안에 긍정적인 의견을 밝힌 것이다.

이번 현대차그룹 개편안 보류로 정부가 추진하던 대기업 구조개혁이 후퇴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김 위원장은 최근 10대 그룹 경영자와 만나 “재계가 지배구조와 거래 관행 개선 사례를 발표하고 추진해 온 것은 정부 정책에도 부합하지만 무엇보다 시장과 사회의 기대에 부응하는 방향”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번 무산으로 인해 시장이 ‘공정위 개편안’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투자업계에서는 현대차그룹에 이어 삼성그룹에 대한 지주사 전환 요구가 여전히 있는 만큼, 이를 위해 중간금융지주회사 설립을 위한 제도 변경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이어지고 있다.

○ 정의선 “주주, 시장과 소통하며 재추진”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이날 지배구조 개편안 중단 결정에 대해 “여러 주주분들 및 시장과 소통이 많이 부족했음을 절감했다. 시장 신뢰가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어 “자동차 사업 본연의 경쟁력과 기업가치를 극대화하고 주주 환원으로 선순환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재계와 시장은 이제 현대차그룹 지배구조 개편안의 향방에 주목하고 있다. 정부의 순환출자 구조 해소 요구를 충족하면서 단기 수익을 빼먹으려는 해외 헤지펀드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내야 하는 과제에 직면했기 때문이다. 정몽구 회장 부자(父子)가 지배구조 개편에 따라 1조 원가량 세금을 내겠다고 밝혔지만 이는 한국 사회에 국한된 사회적 책임일 뿐 해외 기관투자가 설득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나온다. 특히 현대차 지배구조 개편안은 그룹 전체의 미래를 감안한 결정이었지만, 주주들은 개별 회사의 이익에 집중하는 만큼 그 간극을 어떻게 메우고 설득할지도 큰 부담이다. 당장 반대 의견이 많았던 모비스와 글로비스의 분할 합병안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시장에서는 벌써부터 합병 비율 조정, 지주사 체제 전환 등 갖가지 시나리오가 나오고 있다.

한우신 hanwshin@donga.com / 세종=최혜령 기자
#현대자동차#지배구조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