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Special Report]한국 ‘덕후’는 소비리더… 물건 아닌 경험을 팔아라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2일 03시 00분


코멘트

‘한국형 오타쿠’ 잡는 마케팅 전략

각각 10년 이상 컨설턴트로 일해 온 A 씨와 B 씨는 최근 마음 맞는 동료들과 새로 회사를 차려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공동 대표직을 맡게 된 두 사람은 업무에서도 보조를 맞추지만 같은 취미생활도 즐긴다. ‘프라모델 구입과 조립’이다. 30대 후반, 40대 초반이 넘은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들이 ‘덕후’로서의 삶을 즐기고 있는 셈이다.

일본의 ‘오타쿠’들은 뒤떨어진 패션을 하고 두꺼운 안경을 쓴 채 오직 골방에 틀어박혀 자신이 탐닉하는 취미에 모든 시간을 쏟는 사람들로 여겨졌다. 오타쿠들은 또 사회성이 떨어지고 자신의 ‘돈 안 되는 취미’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이상한 젊은이들’이라는 생각도 퍼져 있었다. 하지만 오타쿠를 한국어로 장난스럽게 표현하면서 생긴 말인 ‘오덕후’ 혹은 ‘덕후’들은 특정 대상에 열광하는 ‘마니아’이면서 ‘전문가’라는 이미지도 함께 갖게 됐다. 최근 들어 한국의 덕후들은 새로운 소비집단이자 혁신 아이디어 제공자로 각광받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TV 예능 프로그램들도 과거에는 덕후들을 ‘화성인’ 취급하며 ‘뭔가 이상한 사람들’로 여겼지만 요즘에는 ‘능력자’로 대접하며 그들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다. 이른바 ‘덕후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덕후’가 ‘능력자’가 돼 소비 트렌드를 주도하는 시대에 기업들은 이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마케팅 전략을 짜야 할까. 그들과는 어떤 방식으로 소통하는 게 좋을까.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이자 ‘팬’인 덕후들을 활용한 혁신은 어떻게 할 수 있을까. DBR(동아비즈니스리뷰) 199호(4월 15일자) 스페셜리포트에서는 한국형 오타쿠, 이른바 ‘덕후’의 특성을 분석하고 기업들이 이 ‘능력자’들과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자세히 다뤘다. 스페셜 리포트의 핵심 내용을 소개한다.

○ 일본의 오타쿠와는 다른 한국의 덕후

덕후는 이제 한국 대중문화의 특징을 대표하는 단어로 부상했다. 일상생활에서 스스로 혹은 상대방을 특정 분야의 덕후라고 부르는 일도 흔해졌다. ‘덕밍아웃(자신이 덕후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라는 단어도 자주 사용된다.

하위문화 연구가인 김서윤 씨에 따르면 일본의 오타쿠와 한국의 덕후는 성격이 다르다. 일본 오타쿠는 애니메이션, 아이돌, 게임 같은 콘텐츠에 열광했다. 특히 일본 오타쿠들이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이나 게임들은 성적인 코드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예를 들어 일본의 남성 오타쿠가 좋아하는 애니메이션에는 대체로 과장된 가슴을 가진 대단한 미인들이 등장한다. 이처럼 일본 오타쿠들은 일반인에게는 거리감이 느껴지는 콘텐츠를 주로 선호했다.

하지만 한국의 덕후들은 다르다. 일반인이 일상에서 자주 접하는 대상에 대해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연예인, 드라마, 여행, 영화 등이 대표적이다. 실제 한국에는 스타벅스 덕후가 존재한다. 20, 30대 소비자에게 스타벅스는 단순한 카페가 아니다. 스스로 ‘스벅(스타벅스) 덕후’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시즌마다 출시되는 스타벅스 로고가 새겨진 컵 등을 모은다. 세계 곳곳에서 판매하는 스타벅스 컵을 모으는 사람들도 있다. 또 일본 오타쿠들은 외부와의 소통을 극도로 꺼린다. 하지만 한국 덕후들은 열심히 사 모은 스타벅스 컵 등을 소셜네트워크에 공개하며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한다. 그만큼 소통을 중시하며 타인과의 관계 맺기에도 적극적이다.

○ 덕후와 비즈니스 전략

기업들이 한국형 오타쿠, 즉 덕후를 이해하고 활용하기 위해서는 콘텐츠 자체보다는 ‘덕후 경험’에 주목해야 한다. 예를 들어보자. 키덜트(어린 시절 즐겼던 장난감을 좋아하는 성인)가 많아지고 피규어나 프라모델 등의 취미를 즐기는 사람이 늘어났지만 시장 자체가 엄청나게 커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전부터 이런 취미를 가진 사람이 많았는데 최근 들어 공개적으로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서 갑자기 시장이 커진 것처럼 보일 뿐이라는 분석이다. 현재 한국의 덕후들이 진짜 열광하는 건 경험이다. 피규어 자체나 내용물이 아니라 이벤트와 행사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내가 그 행사에 갔다’ ‘내가 이 특별한 걸 얻었다’라고 자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맥도날드에서 어린이용 세트메뉴인 ‘해피밀’ 장난감으로 슈퍼마리오를 준비했는데 어른들이 열광했다. 김서윤 씨는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슈퍼마리오를 가질 수 있다는 사실, 즉 경험과 공유의 가능성이 그들을 소비로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이를 통해 기업들의 덕후 비즈니스 전략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한국의 덕후는 앞서 언급했듯 ‘이벤트 참가비용’은 기꺼이 지불한다. 아이돌 공연이나 행사 티켓도 웃돈을 주며 구입한다. 하지만 평범한 콘텐츠나 제품 자체는 잘 구매하지 않는다. 제품이나 콘텐츠를 팔기 전에 경험부터 팔아야 한다는 얘기다.

또 게임에서의 도전 과제와 같이 ‘임무’와 ‘보상’의 시스템을 적용하면 매출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스타벅스는 일정 횟수 이상 커피를 사서 도장을 받은 고객에 한해 다이어리를 주는 이벤트를 실시했는데 이런 과정 자체가 지인들과 ‘공유할 거리’이자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에 고객들이 흥미를 갖고 몰입하게 된다.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다. 스스로를 ‘덕후’라고 밝힌 광고마케팅 전문가 김선태 대홍기획 팀장은 “‘덕후들은 우리 팬이니 마케팅에 활용해야겠다’라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 제품을 좋아하는 덕후들이니 우리 제품을 많이 홍보해달라는 식으로 접근하면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 팀장은 “한국에서 질소과자 논란이 있었는데 과자 내용물이 너무 적고 질소 충전만 많이 했다는 불만을 가진 소위 ‘과자 덕후’들이 과자를 테이프로 붙여 한강을 건너는 행사를 여는 등 과자업체들에 큰 타격을 줬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 대신 “덕후들을 최고의 전문가로 예우하면서 그들로부터 조언을 듣고 아이디어를 얻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팀장은 철도 덕후의 사례를 예로 들었다. 그는 “철도 덕후들은 노선과 기차 종류, 각 역의 특징과 구조, 기차의 역사와 유례 등 철도와 관련한 모든 것을 연구하고 정보를 공유한다”며 “철도 회사들은 덕후들로부터 철도 서비스에 대한 개선점을 듣고 때로는 직원으로 채용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김 팀장은 “덕후들이 소비 트렌드를 주도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에 마케터들은 폭격식 ‘매스마케팅’에서 ‘취향저격’의 마케팅으로 전략을 바꿔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리=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한국#일본#덕후#마케팅#전략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