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이상훈]전세물량 없는데 전세대출 확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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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경제부
이상훈·경제부
“전세 자체가 ‘천연기념물’인데 대출 찔끔 늘려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경기 수원시 영통구의 한 공인중개사무소 대표 A 씨는 19일 정부의 ‘제3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 시안’ 발표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수도권 전세대출 한도를 1억 원에서 1억2000만 원으로 올려주는 내용을 담은 저출산 대책에 대해 A 씨는 “현실을 모르는 정책”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요즘 부동산시장에서 전세는 씨가 마른 지 오래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올해 9월 기준 주택 임대차 거래에서 월세가 차지하는 비중이 45.8%로 1년 전보다 6.6%포인트 증가했다. 공급이 달리다 보니 전세금도 다락같이 오르고 있다. 서울 강서구, 경기 광명시 등 전형적인 서민 주거지역마저 이달 들어 3.3m²당 아파트 평균 전세금이 1000만 원을 넘었다. 저금리 장기화로 임대차시장의 판이 새로 짜여지는 상황에서 전세대출을 늘려봤자 전세금 상승폭을 따라잡기에 벅차다. 주택시장에 대한 진단과 처방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가 이번 주거대책의 간판 격으로 내세운 ‘전세대출 확대’는 당장 전세 계약금이 부족한 신혼부부에게는 일부 도움이 될지 모른다. 하지만 가계대출을 팽창시키고 전세시장을 교란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는 우려도 크다. 전세 수요자들에게 정책자금 대출이 나가면 그만큼 전세금이 오른다는 게 부동산 업계의 정설이다. 국회 예산정책처는 지난달 ‘주거안정 사업평가’ 보고서에서 전세 보증지원을 1% 확대하면 전세금이 0.12% 상승하는 효과가 있다고 분석했다. “전세자금 지원이 전세금을 올리고 주거안정 효과를 감소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신혼부부의 전세 임대주택 지원자격을 완화하고 나이가 어린 부부에게 가산점을 주겠다는 아이디어도 마찬가지다. 공공 임대주택 공급이 좀처럼 늘지 않는 상황에서 장애인, 고령자, 저소득계층, 다문화 가정 등에 대한 복지 정책을 마련할 때마다 자격 완화라는 손쉬운 해법에 의존하다 보니 시장에서는 임대주택이 지어질 때마다 ‘누가 더 형편이 어려운가’를 놓고 경쟁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서민들의 주거를 안정시키려면 적어도 10년 앞을 내다보고 공공 및 민간 임대주택의 공급을 늘리는 중장기적인 시각과 주택시장의 수요를 고려한 시장친화적인 접근방법을 꾸준히 추진해야 한다. ‘전세금이 올라 집을 못 구한다니 대출을 늘려주겠다’는 식의 1차원적 접근은 시장의 거품만 만들고 출산 장려와 주거 안정 중 어느 목표도 달성하기 어렵다.

이상훈·경제부 january@donga.com
#전세물량#대출#확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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