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 원천기술 부족… 불황-환율에 속수무책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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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조업 매출의 83%가 자재-인건비 등 고정비용… 세계 최고
위기의 한국 제조업

《 한국 제조업이 높은 원가 구조 때문에 위기 극복 시나리오조차 쓰기 힘든 상황에 처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14일 미국 시장조사업체 톰슨로이터가 한국 미국 중국 독일 일본 영국 프랑스 브라질 러시아 인도 등 10개국 9427개 상장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2010∼2014년 평균 매출액 대비 매출원가 비중을 분석한 결과다. 한국 제조업체의 매출원가 비중이 82.5%로 가장 높았다. 원자재비 인건비 등을 합친 매출원가는 고정비 성격이 짙다. 고정비가 높으면 경기 침체나 환율 쇼크 등 경영 환경 변화에 대응하기 힘들다. 한국 제조업체의 지난해 영업이익률이 10개국 중 유일하게 전년보다 떨어진 배경 중 하나다. 》

스마트폰용 터치스크린 부품을 생산하는 경기 안산시 소재 A사는 지난해 영업손실이 매출액의 절반에 가까운 150억 원이었다. 2013년부터 2년째 적자지만 ‘비용 줄이기’를 통한 수익성 개선도 어렵다. 고정비용인 매출원가가 워낙 높기 때문이다. A사의 매출원가는 2013년에는 총 매출액의 90%, 2014년에는 오히려 매출액보다 더 많았다. A사 관계자는 “매출원가 비중이 높다 보니 납품 단가 하락은 곧 손실로 직결된다”고 말했다.

A사는 한국 제조업의 구조적 위기를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지난해 세계적 저성장 기조에도 선진국 제조업체들은 점차 수익성을 회복하고 있지만 한국만 예외다. 높은 매출원가 구조가 ‘위기 대응력’을 약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 및 태양광 발전설비 제조업체인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AMAT)’가 중국 시안에 설립한 태양광 연구개발센터. AMAT는 독점적 기술력으로 가격 협상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어 매출 원가 비중이 57.6%에 불과하다. AMAT 홈페이지 캡쳐
세계적인 반도체 장비 및 태양광 발전설비 제조업체인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AMAT)’가 중국 시안에 설립한 태양광 연구개발센터. AMAT는 독점적 기술력으로 가격 협상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어 매출 원가 비중이 57.6%에 불과하다. AMAT 홈페이지 캡쳐
○ 위기 대응 불가능한 중견·중소기업

한국 제조업계의 ‘얼굴’은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기업이지만 ‘몸통’은 기업 수 기준으로 80%를 넘는 부품·장비 분야 기업들이다. 이 기업들 가운데 일부 대기업 계열사를 제외하면 매출원가 비중이 대부분 90%를 넘는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조정이 용이한 판매비·관리비 비중은 10%대에 불과해 조사 대상 10개국 중 가장 낮다.

원가가 높은 이유로 국내 기업들이 원천 기술력이 부족해 가격 경쟁력에만 집중하는 점이 꼽힌다. 외부 환경 변화에도 쉽사리 높은 가격을 받지 못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유리, 석영 등 중간재를 만드는 국내 제조사 관계자는 “원자재 가격이 올라도 단가를 올리기 어려워 수익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반면 선진국에는 강력한 시장 지위를 가진 부품·장비 기업이 적지 않다. 스마트폰 필수 부품인 세라믹 콘덴서 시장 1위 기업으로 지난해 1조435억 엔(약 9조5639억 원)의 매출을 올린 일본 무라타(村田)제작소의 매출원가 비중은 60%에 불과했다. 반도체 장비업계 선두인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AMAT)도 매출원가 비중이 57.6%였다. 독점적 기술력으로 가격 협상 주도권을 행사한 덕분이다.

높은 매출원가 비중은 수익성 하락과 직결된다. 전체 국내 제조업계에서 부품·장비 기업 비중은 81.4%로 88.8%인 일본과 비슷하다. 하지만 전체 제조업체가 올린 영업이익에서 이 기업들의 영업이익이 차지하는 비중은 한국이 24.8%, 일본은 91.7%로 상당한 격차가 난다. 이한득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국내 부품·장비 기업 상당수가 높은 매출원가 비중 때문에 수요 침체, 환율 리스크 등의 위기 대응을 위한 시나리오조차 짤 수 없는 구조”라고 지적했다.

○ 인건비 오른 대기업도 고(高)원가 신음

국내 대기업 계열 제조업체의 매출원가 비중은 한국 평균치보다는 낮다. 하지만 최근 인건비가 급등하면서 매출원가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 매년 매출원가 비중을 낮추고 있는 일본 도요타나 독일 폴크스바겐 등 해외 대기업과는 대조적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10∼12월) 한국의 단위노동비용(같은 상품을 만드는 데 드는 노동비용·2010년 비용을 100으로 산정했을 때 값)은 106.4665. 일본(100.6919)은 물론이고 프랑스(105.4832) 영국(105.3956) 미국(106.18)보다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 실제 2013년 현대자동차의 매출 대비 인건비 비중은 14.32%로 2011년 대비 2.4%포인트 늘어나면서 독일 폴크스바겐(13.92%)을 앞질렀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기업 인건비가 지나치게 높아지면 협력업체 수익률까지 떨어뜨리는 요인이 된다”며 “적정한 임금 인상 수준을 정하는 타협이 절실한 상황”이라고 강조했다.

국내 제조업체의 기술력을 끌어올리고 판로를 확대해 가격 경쟁에만 얽매이지 않는 구조로 만드는 것도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승일 중견기업연구원장은 “대부분의 국내 제조업체가 머물러 있는 ‘겨우 생존하는 수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원천기술 개발과 판매처 다변화 등을 지원해 매출원가 비중을 낮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황태호 taeho@donga.com·김호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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