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에 높아진 병원 문턱, “수입도 없는데…병원 안 갈 수밖에”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16일 17시 39분


경기 이천시에 사는 김모 씨(58)는 만성 기관지염을 앓고 있다. 그는 황사로 인해 호흡기 질환에 문제가 생기면 자주 병원을 찾곤 했지만 지난해엔 3번 밖에 병원을 가지 않았다. 지난해 초 다니던 중견기업에서 퇴직한 뒤 ‘적극적인 생활비 절감’ 차원에서 내린 결정이다.

김 씨는 “회사를 다닐 땐 건강관리 차원에서 조금만 몸이 안 좋아도 병원에 갔지만 지난해부터는 기관지염이 아주 심해졌을 때만 병원을 찾았다”며 “퇴직한 뒤 마땅한 수입도 없는 상황에선 돈을 아끼기 위해 병원을 가는 것도 줄일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최근 이어지고 있는 경기침체로 김 씨처럼 적극적으로 의료비 지출을 줄이고 있는 사람들이 느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가 16일 발표한 ‘2014년 건강보험 재정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건강보험 재정은 4조5869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다. 건강보험 누적 적립금 규모도 12조8072억 원으로 8조2203억 원이었던 4조5869억 원 늘었다.

건강보험 재정이 이처럼 큰 규모의 흑자와 누적 적립금을 기록하게 된 건 주요 질환별 급여비 지출 증가율이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호흡기 질환의 경우 2007~2010년간 연평균 급여비 증가율은 10.7%였지만 2011~2014년 간 연평균 증가율은 1%에 그쳤다. 같은 기간 중 당뇨병과 고혈압의 연평균 급여비 증가율도 각각 10.2%에서 5.6%, 24.5%에서 5.4%로 크게 줄었다.

김진수 연세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경제 사정이 안 좋아지면 서민층을 중심으로 평소 같으면 병원에 갔을 증세에도 병원에 가지 않거나, 건강검진 같은 예방 조치를 안 받는 경우가 크게 늘어난다”고 말했다.

충남 지역에서 가정의학과를 운영하고 있는 김모 씨도 “꾸준히 병원을 찾아 관리를 해야 하는 만성질환 환자 중 ‘저렴한 약을 달라’거나 ‘꼭 필요한 검사만 받게 해 달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며 “저소득층과 노년층에서 이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처럼 불황 때문에 병원 문턱이 높아지는 현상을 막으려면 건강보험 보장률을 더욱 적극적으로 올려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2013년 말 기준 약 63% 수준에 머물고 있는 건강보험 보장률을 더 끌어올려 한다는 것.

김 교수는 “불황 시기에는 서민들에게 30%대의 본인 부담률은 만만치 않은 부담”이라며 “병원을 가지 못해 병을 키우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중·장기적으로 더욱 큰 사회적 비용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복지부 안팎에선 건강보험 재정의 흑자와 누적 적립금 규모가 예상보다 크게 나오면서 건강보험 보장률을 더 높여야 한다는 주장이 앞으로 더 강하게 제기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한편 2014년 건강보험 재정현황에 따르면 암 관련 급여비 지출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2007~2010년 간 연평균 증가율이 15.7%였지만 2011~2014년은 3.1%에 그쳤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복지부는 암 검진율이 상승했고, 복강경 수술 같이 긴 기간의 입원이 필요 없는 시술이 늘어난 데 따른 결과로 분석했다.

반면, 치과 관련 급여비 증가율은 크게 늘어났다. 치과의 경우 최근 5년 사이 급여비 증가율이 연평균 23.4%였는데 틀니, 스케일링, 치아 홈 메우기 등에서 보장성 확대가 이루어진 것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