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 경기부양만 급급… ‘시한폭탄’ 키웠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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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융위기 탈출의 그림자… 한국만 가계빚 늘어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던 박은심(가명·51) 씨는 지난해 개인파산을 신청했다. 3년 전 갈빗집을 시작하면서 2억 원을 대출받았다가 사업 부진으로 원금과 이자를 제때 못 갚았기 때문이다. 손실이 커지면서 급한 대로 신용카드 현금서비스, 대부업체 대출 등을 이용했지만, 채무불이행자 신세를 면치 못했고 결국 법원으로 발길을 향했다. 박 씨는 “빚은 절반 이상 탕감 받았지만 정상적인 금융거래가 불가능해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소연했다.

한국의 가계부채 증가세가 저성장 탈출이 시급한 한국 경제에 또 하나의 시름을 안기고 있다. ‘디레버리징(deleveraging·부채 축소)’이라는 글로벌 흐름에 정면으로 역행하고 있는 것. 경기침체로 가계소득이 정체돼 있는 가운데 빚의 규모는 빠르게 늘어나면서 부채 문제는 한국경제의 최대 ‘뇌관’으로 부상한 상태다.

내수에서 경제 활로를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이미 1000조 원에 육박한 가계부채는 정책당국에 심각한 족쇄가 될 수 있다. 선진국의 출구전략이 본격화되면 금리인상으로 채무자의 부담이 급증할 수 있다는 점도 큰 부담이다.

○ 전문가들 “위기 탈출에 급급했던 부작용 나타났다”

한국 가계부채의 절대 규모는 지난 10년 동안 경제성장률을 훨씬 능가할 정도로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성장률이 4, 5%대였던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가계부채 증가율이 무려 10% 안팎에 달했고, 금융위기 직후 경기침체기에 빠진 다음에도 가계 빚은 매년 7, 8%씩 늘어났다. 특히 이 같은 부채 증가 속도는 가구 소득의 증가 속도를 압도하면서 가계의 채무상환 능력도 심각하게 떨어졌다. 현대경제연구원이 자산·소득 대비 부채와 이자비용, 연체율 등을 계산한 결과 올해 가계부채의 위험도는 148.7로 금융위기 때인 154.4에 거의 근접한 것으로 나타났다.

한국의 가계 빚이 선진국과 다르게 유난히 빠른 속도로 불어난 이유는 경제위기 대응방식이 다른 나라와 달랐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위기 이후 미국 등이 씀씀이를 줄이고 빚을 갚는 데 주력한 반면, 한국은 일단 과도한 충격을 막기 위해 소비를 늘리고 금리를 낮게 유지하는 등 경기 부양에 힘을 썼다는 것이다.

김경수 성균관대 교수(경제학)는 “금융위기 직후 실질금리가 한동안 마이너스일 정도로 정부가 저금리 정책을 상당 기간 유지한 부작용이 결국 가계부채 급증으로 이어졌다”며 “그 결과 과도한 빚이 소비지출 억제로 이어지는 ‘부채 디플레이션’ 현상이 지난해 말부터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7월 국회에서 열린 가계부채 청문회에서도 새누리당 의원들 사이에서 “이명박 정부가 금리 인상 타이밍을 놓친 게 가계부채를 키웠다”는 비판론이 나왔다. 당시의 저금리 기조가 금융위기 탈출에는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부채 관리’라는 경제 구조적인 문제는 외면해 결국 현 정부에 부담을 줬다는 지적이다.

지난 정부에서 현 정부까지 이어진 각종 부동산 관련 대책들도 가계부채를 막기보다는 키우는 쪽으로 작용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명박 정부가 27차례 발표한 크고 작은 부동산 대책은 경기를 부양하고 서민층에게 내 집 마련의 길을 열어줬다는 측면에서는 긍정적이었지만 동시에 빚을 통한 주택구매를 유도함으로써 ‘정부가 빚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나왔다. 새 정부도 ‘4·1 부동산 대책’을 시작으로 ‘7·24 대책’, ‘8·28 전월세 대책’ 등 발표된 정책마다 신개념 주택금융상품 개발, 대출규제 완화 및 금리 인하 등 가계부채 증가세를 사실상 용인하는 내용들이 주로 담겼다.

○ “중장기 구조적 대응 절실”

정부는 가계부채의 심각성을 잘 알고 있지만 당장 급박한 정책대응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라는 반응이다.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최근 국회 답변에서 “가계부채 문제는 규모나 증가 속도, 금융시스템 등으로 볼 때 아직 위기상황이라고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계부채는 증가 속도뿐 아니라 질(質)도 같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 문제다. 우선 정부가 제도권 금융기관의 대출 억제에 초점을 맞추다가 오히려 더 위험한 제2금융권의 가계대출을 늘렸다는 지적이 많다. 기재부의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최근 3, 4년 동안 비(非)은행 부문의 대출 증가율은 은행대출 증가율의 거의 두 배가량이나 됐다. 전체 가계대출에서 3개 이상 금융사에서 돈을 빌린 다중채무자의 부채 규모 역시 올 6월 말 기준 29.1%나 된다. 이들의 1인당 평균 부채액은 1억300만 원으로 일반 채무자 채무액(5000만 원)의 두 배가 넘는다.

전문가들은 근본적으로는 가계소득을 높여 채무상환 능력을 높이는 게 가장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박덕배 현대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건전한 대출자에게는 돈이 돌도록 하되, 빚이 많은 사람들에게는 부채를 줄이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며 “가계부채 위기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지 않도록 금리 인상도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하준경 한양대 교수(경제학)는 “가계부채는 결국에는 채무자의 소득을 올려 빚을 갚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워줘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며 “부채의 상당 부분은 서비스업 등에 종사하는 자영업자가 차지하고 있는 만큼 서비스업을 활성화해 이런 자영업자의 소득을 늘려주는 방법이 거의 유일한 해결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유재동 기자·이상훈·정임수 기자 jarrett@donga.com
#빚#디레버리징#가계부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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