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오전 경기 부천시 축산물품질평가원 서울지원에서 품질평가사들이 쇠고기 등급을 매긴 뒤 도장을 찍고 있다. 평가사들은 설 연휴를 앞두고 평소보다 약 50% 늘어난 물량에 눈코 뜰 새가 없다. 최고 등급인 ‘1투플러스 A등급’(작은 사진)을 받은 소는 경매에서 최고 대우를 받는다. 부천=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아니, 벌써 일어나?”
지난달 29일 오전 8시 45분. 경기 부천시 축산물품질평가원 서울지원의 한 품질평가사가 아침으로 우유와 빵을 먹다 볼멘소리를 했다. 평가사들은 휴식시간을 줄이고 평소보다 10∼20분 일찍 사무실 의자에서 일어난다. 설 연휴를 앞두고 늘어난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서다.
이날 찾은 축산물품질평가원 서울지원에서는 유무상 지원장을 비롯한 직원 7명이 아침 일찍부터 냉장실에서 쇠고기 등급 판정을 위해 고기와 씨름하고 있었다. 이들은 설 연휴를 앞두고 약 2주 전부터 늘어나기 시작한 쇠고기 공급량에 속도를 맞추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 설 앞두고 처리물량 50% 늘어
쇠고기 물량은 설이나 추석 연휴 2, 3주 전부터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다. 농가들은 설이나 추석 대목에 맞춰 소를 많이 출하하기 때문에 명절 직전에는 도축을 기다리는 소들이 넘쳐난다. 1월에도 전국 평가원에는 지난해 12월보다 물량이 약 50%가 늘어난 12만여 마리의 소가 몰렸다.
등급 평가는 보통 오전 7시 30분경 시작한다. 먼저 랜턴과 조견표 등을 들고 고기를 꼼꼼히 살핀다. 평가사들은 고기의 양(육량)과 질(육질)을 평가해 등급을 매긴다. 육량 등급은 도축된 소에서 뼈를 발라낸 뒤 얻을 수 있는 고기의 양이 얼마나 되는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A, B, C등급으로 나뉜다. 육질 등급은 크게 지방 함량과 고기 및 지방의 색깔을 측정해 결정한다. 가장 높은 1투플러스(++)부터 1플러스(+), 1∼3등급 등 총 5단계다. 등급 판정이 끝나면 4명이 한 조가 돼 확인 작업을 하고 “철썩” 소리를 내며 일일이 도장을 찍는다.
평가사들은 오전 7시쯤 출근하는데 오전 9시부터 10시까지가 가장 바쁘다. 경매가 매일 오전 10시에 시작하는데 그 전에 예정된 소의 등급 판정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평가사 6명은 보통 하루 340여 마리를 판정하지만 설 연휴 보름 전부터는 매일 20마리씩 더 판정하고 있다.
시간제한이 있기 때문에 평가사들은 혼이 빠질 정도로 바쁘다. 한 마리를 판정하는 데 짧게는 2분, 길게는 4∼5분이 걸리는 평가 시간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그 바람에 평소에는 30분 정도 가지던 휴식시간이 절반으로 줄었다. 휴식시간에도 시료 채취를 위한 준비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쉬어도 쉬는 게 아니다.
이렇게 해도 늘어나는 물량을 모두 처리하기는 어렵다. 서울지원도 예년에는 설 연휴를 일주일 앞두고 한 차례만 해왔던 토요일 특근을 이번엔 3주 전부터 시작했다. 양희찬 축산물품질평가사는 “그래도 ‘빨리 출하할 수 있게 서둘러 달라’는 농가의 독촉이 끊이지 않는다”고 말했다.
최근 물량 급증은 2010년 말부터 전국을 휩쓸었던 구제역 파동이 영향을 미쳤다. 이승곤 서울지원 이력팀장은 “이번 설에는 구제역 파동 이후 새로 자란 소들이 본격적으로 몰려 공급량이 더 늘었다”고 말했다. 보통 출하되는 소의 월령은 24∼30개월이다. 구제역 때 도살처분으로 기르던 소를 정리한 농가들이 새로 키우기 시작한 소들이 이번에 본격적으로 출하되기 시작한 것이다.
○ 가격 때문에 울상인 농가 안타까워
“은행 다니는 사람들이 돈 많이 봤다고 돈 싫어하지 않잖아요?”
유 지원장이 껄껄 웃었다. 연휴를 앞두고 매일같이 소와 씨름하느라 고기를 보는 것도 싫어할 것이라는 기자의 생각은 빗나갔다. 이들은 오히려 명절 때가 되면 예전보다 고기를 바라보는 눈이 또렷해진다. 연휴 근처 식당을 가거나 마트를 가도 고기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고 말했다. 한 평가사는 연휴 기간 식당에서 비싼 부위를 주문했는데 값싼 부위로 가져온 것을 한눈에 알아보고 주인에게 핀잔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평가사들은 예년과 달리 마냥 신이 나지는 않는다. 연휴를 앞두고 kg당 2000원 이상씩은 뛰어야 하는 쇠고기 값이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축산농가에선 “구제역이 창궐했을 때 소를 더 묻었으면 지금 소 값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씁쓸한 농담이 오가기도 한다.
명절을 앞두고 보통 비쌀 때는 kg당 1만8000원을 웃돌았던 한우 1투플러스 가격이 1만5845원(지난달 29일 기준)이었다. 똑같이 설을 12일 앞뒀던 지난해 1월 11일과 비교해 보면 1투플러스가 한 등급 아래인 1플러스 등급(1만5618원)과 비슷한 수준이다.
평가사들은 “소를 가져오는 농가들의 표정이 안 좋으니 우리도 덩달아 마음이 안 좋다”며 “바쁜 건 상관없는데 더 즐겁게 일하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유 지원장이 말했다. “생산자들은 다들 울상입니다. 대목인데도 소 값이 예전 같지 않으니 좋은 것보다 걱정이 앞선다고 하더라고요. 2, 3년씩 키운 소가 제값을 받아야 저희도 흐뭇하지 않겠어요? 빨리 경기가 좋아져서 축산농가도, 저희도 모두 기분 좋게 일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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