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고졸 있던 비정규직 자리 채우고… 경력직 합쳐 생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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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9월 1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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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권, 3년간 8718명 고졸인력 채용 약속 공수표로


《 “앞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지금까지의 고졸 채용 확대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확산시키면서 제도와 문화로 정착시켜 나가는 것입니다.”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지난해 10월 서울 중구 명동 은행회관에서 열린 교과부와 5개 금융 관련 협회의 공생발전 업무협약 체결식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특성화고 출신 채용 확대와 금융전문가 육성이 당시 정부와 협회들이 내세운 가장 중요한 항목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1년이 지난 현재 금융권의 특성화고 채용 현실은 ‘외화내빈(外華內貧)’에 가깝다. 각 협회가 채용했다고 밝힌 규모 중 실제 특성화고 출신 신입사원은 4명 중 1명꼴이었다. 어렵게 금융회사에 취업한 적지 않은 고졸 사원들은 대졸 사원에 눌려 심한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다. 》
○ 특성화고 채용은 속빈 강정

빛바랜 1년 전 약속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왼쪽에서 세 번째)과 5개 금융 관련 협회장이 지난해 10월 26일 서울 중구 명동 은행회관에서 고졸 인력 채용 활성화를 위한 ‘공생발전 공동 업무협약’ 체결식을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제공
빛바랜 1년 전 약속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왼쪽에서 세 번째)과 5개 금융 관련 협회장이 지난해 10월 26일 서울 중구 명동 은행회관에서 고졸 인력 채용 활성화를 위한 ‘공생발전 공동 업무협약’ 체결식을 마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교육과학기술부 제공
군 제대 후 중소기업에 취직해 5년 동안 이 회사 사장의 승용차를 운전했던 정모 씨(30)는 지난해 여름부터 ‘은행원’으로 변신했다. 한 시중은행의 임원 차를 모는 일이 정 씨의 직무다. 그러나 이 은행은 전문대를 중퇴한 정 씨를 ‘고졸 신규 채용’으로 분류했다.

금융회사들이 ‘고졸 채용’으로 분류해 정부에 보고한 직원 중에는 보험회사 상담직, 카드사 콜센터 직원, 시설관리직, 보험모집 보조업무, 경리직, 운전사 등이 다수 포함돼 있다. 대학 재학 중에 채용돼도, 다른 직업에 종사하다가 경력 채용된 직원도 학력이 고졸이면 모두 고졸 채용에 포함됐다. 지난해 금융권이 뽑았다고 보고한 고졸 2985명 중 신입사원 730명을 제외한 2255명은 이렇게 집계된 것이다.

지난해 카드사와 캐피털사 등은 543명의 고졸 사원을 채용했다고 밝혔지만 특성화고 출신 신입사원은 전무했다. 특성화고 출신 신입사원이 없다는 것은 금융 관련 업무에 배치된 고졸 사원이 없다는 의미다. 금융회사 취업에 대비해 관련 교과목을 가르치는 특성화고 출신이 아닌 일반 고교 졸업생을 채용해 금융 업무를 맡기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 한 금융 전문가는 “입사하면 직무 교육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금융 관련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고졸 신입사원이 지점에서 고객을 응대하거나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특성화고 출신 신입사원이 금융 전문가가 되겠다는 희망도 쉽게 이룰 수 없는 꿈이 되고 있다. 지난해 8월 한 증권사에 입사한 A 씨(19·여)는 현재 콜센터 상담사로 일한다. A 씨는 “입사할 때는 당연히 지점 창구에서 일할 줄 알았다”며 “고졸 사원은 직무를 아예 정해 놓지 않았다는 걸 나중에 알았는데, 콜센터에 배치 받아도 문제 제기를 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장치 같다”고 말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금융 관련 협회들은 회원사별 고졸 채용 계획과 실적 자료를 요청받자 ‘회원사별 자료가 언론에 나가면 회사별로 비교될 수 있다’, ‘자료가 없다’는 식으로 발뺌했다. 교과부와 금융위원회도 비슷한 행태를 보였다. 금융위는 “자료를 줄 수 없다”고 했지만 국회의원실에서 자료를 요청하자 마지못해 협회별 실적을 새로 파악해 제출했다.

이번 조사는 다른 연구 결과로도 입증된다. 지난달 서울시교육청과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발표한 ‘특성화고 진로이력 분석연구 2012’에 따르면 서울 75개교 특성화고 중 올해 2월 졸업한 1만8296명 중 6813명이 채용됐고 이 중 금융 및 보험업에 취업한 인원은 428명(6.3%)에 불과했다.

○ 입사해도 유리천장에 좌절

지난해 8월 한 증권사에 입사한 특성화고 출신의 B 씨(19·여)는 회사가 시키는 것은 무엇이든 열심히 일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달간의 연수 뒤 B 씨가 배치받은 지점은 경기 안양시였다. 집이 서울 영등포구인 B 씨는 ‘출근할 직장이 있다’는 기쁨에 지하철에서 왕복 두 시간을 서 있어도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몇 달 뒤 대졸 사원들은 첫 발령을 받을 때 일하고 싶은 부서와 지점을 적어 내면 인사부에서 이를 최대한 반영해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B 씨는 “고졸 사원들에겐 희망 부서나 지점 등을 전혀 물어보지 않았다”며 “고졸 사원들은 그저 회사가 원하는 곳으로 무조건 가야 하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어렵게 취업해도 그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벽이 존재했다. 누구나 선망하는 금융권에 당당히 입사한 고졸 신입사원들은 “공식적인 차별은 없지만 막상 일을 해보니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는 상황이 많다”고 말한다.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피땀 흘려 능력을 갖춰도 연봉, 승진 등은 대졸 사원을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유리천장’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이 때문에 아예 회사를 그만두고 대학 진학을 고민하는 고졸 사원도 있다. 금융권 고졸 사원이 대졸 사원 첫 직급인 계장이나 주임이 되려면 평균 8년 정도의 경력이 있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증권사 고졸 사원 김모 씨(21·여)는 “같이 일하던 대졸 인턴 2명이 6개월 뒤에 정규직으로 전환됐는데 나보다 연봉이 기본급만 1000만 원이 많았다”며 “업무는 내가 더 잘 알고 내가 그 사람들 일의 뒤처리까지 다 해주는데 그들보다 연봉이 적으니 억울했다. 그래서 요즘엔 아예 대학에 가서 스펙을 더 쌓아볼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황형준 기자 constant25@donga.com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비정규직#금융권#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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